[기록] 낙원 No.156 (기록 : 박현신)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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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 2024년 10월 3일

대  상 : 낙원동 낙원시장 옷수선집 44년 운영 대표 이상덕

장  소 : 낙원시장 옷수선집 No.156 (구. 신신포목)

주  제 : 종로의 공간


한두 달 전 집 앞 공터 입구에 옷 수거함이 놓였다. 그 이후 이른 아침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큰 트럭이 멈추고 수거함에 잔뜩 채워진 옷 보따리가 트럭 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산처럼 쌓인 옷더미에 떨어지는 퍼포먼스를 창밖으로 보게 된다. 트럭 안은 보따리가 풀어 헤쳐져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각양각색의 옷들이 엉켜있다. 원피스, 양복, 운동복, 바지, 코트. 입은 지 오래된 낡은 옷도 유행에 뒤처진 옷도 아닌 상태가 양호한 옷들이 더 많아 보인다. 사람들의 몸에 걸쳐졌다가 용도폐기 된 저 수많은 옷의 운명은 멀리 비행기 타고 외국인들 몸에 다시 입혀지겠지만 대부분 태워지고 땅속에 묻어진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이후 의류 쇼핑몰 사업이 번창하면서 의류 시장은 fast fasion으로 옷의 수명이 너무 짧아졌다. 사계절이 있어서 다양한 옷들을 구경하고 골라 입는 재미가 있지만 옷장을 열어보면 입는 옷보다 안 입는 옷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기분 전환과 충동구매가 지나간 후 매번 뒤늦게 느낀다. 심각해지는 의류 쓰레기 공해에 동참하고 있는 거다. 옷단을 늘리고 줄여서 입고 팔꿈치에 구멍 난 스웨터는 이쁜 헝겊이나 자수로 덧대어 입었던 수명이 긴 시절의 옷들은 옷 수선집에 들어가면 재탄생하여 주인의 체취를 맡으며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옷 수선의 필요성이 상실돼 가고 동네 상가나 시장 안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수선집 간판을 찾아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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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 보따리장수로 낙원시장을 드나들다

고향은 전라북도 고창이에요. 시골에서 올라와 경기도 양주에 살면서 미군 부대가 있는 동두천 기지촌에 가면 미국에서 들어온 식품, 생활용품을 구할 수가 있었어요. 그걸 가지고 인천으로 팔러 나가다가 친구들이 멀리 가지 말고 종로로 가자고 해서 여기로 오게 됐지. 내가 21살에 결혼해서 둘째를 23살에 낳고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낙원시장으로 보따리 장사를 시작한 거야. 1970년도에 낙원상가 아파트가 완공되고 얼마 안 됐을 때니까 상점들이 띄엄띄엄 있더니 하나둘씩 생기면서 시장 안이 꽉 찼어요. 서울에서 처음으로 생긴 부자들이 와서 사는 상가아파트니까 돈 벌려고 너도나도 장사하러 들어온 거지.


그때 돈 많이 버셨겠어요?

파는 건 많이 팔았어도 많이 못 벌었어요. 기지촌에서 물건 떼다가 파는 게 위험한 장사였어. 불법으로 들어온 물건을 파는 거라 단속에 걸리면 뺏기고 세금을 물어야 했지. 물건 5만 원어치 걸리면 10배인 50만 원을 내야 하고 담배는 30배 세금을 내야 했어요. 시청, 전매청 공무원, 경찰을 피해 다니고 검문소에서 걸리면 팔 물건을 몽땅 가져가도 내 물건이 아니라고 끝까지 발뺌할 수밖에 없어. 어마어마한 세금을 안 내려면 말이야. 1973년도에 막내아들을 낳고 몇 달 안 됐을 때 먹고살아야 하니까 물건 팔다 걸려서 막내 업고 유치장에 잠깐 들어간 적도 있어요. 그때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이더라고.


1976년 서울 도봉구 창동으로 이사

감시하는 눈을 피해 가며 팔았던 물건들이 정식으로 수입되고 합법적으로 유통 판매되면서 미제 파는 가게가 여기저기 많아지고 가격은 싸지고 어디서 구경도 못한 귀한 물건 팔던 보따리장수 돈벌이가 시원찮아졌어. 장사를 그만두고 서울 도봉구 창동으로 이사 왔지. 그 후로 쌍문동에서 살고 사당동, 서대문, 혜화동에서도 살고 서울 와서 12년 동안 6, 7번 이사했을 거야. 남의 집에 사니까 집이 매매되거나 전세금을 올리면 꼼짝없이 이삿짐을 싸야 했지.


아이들과 집을 옮겨 다니는 게 힘드셨겠어요? 자녀분이 몇이세요 ?

딸 아들 딸 딸 딸 딸 아들 일곱이야. 둘째 딸은 중3 때 백혈병으로 일찍 갔어. 그때 우리 남편이 엄청나게 힘들어했어. 의술이 안 좋은 때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로서 지켜주지 못한 게 마음에 응어리가 져서 병이 됐는지 4년 만에 남편도 46살에 떠났어요. 옛날에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많이 배운 고학력자였는데 남편이 고등학교 나온 고학력자에 군대를 안 갔다 왔어. 시아버지가 큰아들이라고 군대를 안 보냈더니 취직이 안 됐어요. 이러다 손주들 굶기겠다 싶어서 서울에 방 하나 얻어놓고 올려보내서 뭐라도 해서 빌어먹고 살라고 했지. 근데 시골에서 농사일도 안 해보고 곱게 자랐는데 서울 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생활력이 없었어요. 남편만 믿고 아이들을 키울 수 없어서 26살에 돈 벌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을 손에 못 놓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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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돈 좀 벌었지

손재주가 좋으신가 봐요. 어떻게 옷 수선을 하게 되셨나요?

옛날 시골에서는 집에서 옷을 다 만들어 입었잖아. 저고리, 두루마기, 치마 옷감을 떼다가 바느질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어요. 바느질 솜씨가 좋다고 동네에 소문이 나서 잔칫집, 초상집, 시집, 장가간다고 하면 그 집에 가서 바느질해 주러 가셨어. 그 재주를 물려받았는지 기본적인 옷들은 만들 줄 알았어. 낙원시장에 물건 팔면서 익선동에 모여있는 고급 요정 술집에 양주, 담배, 미제용품들을 대줬지.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식당 내부를 보니까 큰 밥상을 덮는 상보와 손님 무릎에 덮는 헝겊 냅킨이 보이더라고. 손님이 오면 밥상을 치울 때마다 깨끗한 새 상보와 무릎 덮개 냅킨을 교체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물량이 수백 개가 필요할거 아니에요. 국내 1호 관광 요정인 ‘오진암’ 그리고 ‘명월’,‘대하’ 술집에 하루에만 수백 명이 들락날락했으니까. 옳지 이거다! 생각이 들어서 이걸 만들어 줄 테니 나한테 주문하라고 했지.


어떻게 그런 비즈니스 감각을 발휘하셨어요?

내가 학교 문 앞에도 못 간 무식한 사람이지만 머리는 잘 돌아가. ‘오진암’은 하루에 500~1,000장씩 필요했어. 손님이 가면 걷어내서 세탁하는 사람이 가져가고 난 새로 만들어서 저녁마다 가져다줬지. 처음엔 이 일로 매일 손바느질하니까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어. 나중엔 일이 많아져서 미싱 사다가 했지. 그때는 요정 술집 업계가 장사가 잘돼서 덕분에 나도 그 일을 하면서 돈을 좀 벌었지. 하루에 공무원 월급의 절반 이상을 번 기생도 많았다고 하더라고. 근데 뭐든 영원한 것이 없다고 88 올림픽 이후로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오면서 술집들이 호텔, 오피스텔로 바뀌고 주변 술집, 한정식집들이 강남으로 이전을 했지. 납품했던 물품들은 동대문시장에서 싼 가격으로 대량 주문이 가능하니까 일이 거의 줄어들었어요.


‘신신 포목 114호’ 옷 수선집을 시작하다

10여 년 동안 보따리장수로 왕래한 낙원시장에서 1980년 후부터 엉덩이 붙이고 장사를 시작했어. 처음 가게는 여기가 아니고 저 앞쪽이에요. 6·25 때 이북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신신 포목’이름으로 장사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그 자리에서 장사하고 내가 1,500만 원을 주고 가게를 사서 시작했지. 나중에 옆 가게 아저씨한테 다시 팔고 월세 30만 원 내면서 장사했어. 거기서 34년 정도 하고 여기로 온 지 10년 정도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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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상호도 없고 156번이네요. 그 전 가게는 상호가 뭐예요?

그 전 주인이 지은 ‘신신 포목 114호’ 그대로 걸어놓고 했지. 여기는 이름 없이 그냥 ‘156’이야. 이 가게 들어올 때는 다시 1,500만 원 주고 자리를 샀어요. 월세 안 나가고 관리비 15만 원만 내면 돼요. 가게 산다고 하니까 아이들이 “엄마 나이가 80인데 무슨 장사를 더 하려고 하시냐, 고생 그만하셔라” 엄청나게 말렸는데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을 잘랐지. 내 나이 올해 89살인데 아직도 소일거리 있고 용돈 버니까 아이들한테 손 안 내밀고 월세 안 나가니까 마음 편하고 출퇴근하면서 움직이니까 운동 되고 치매 예방되고 얼마나 좋아.

단골손님

수선 작업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듯 재봉틀 옆에 뽀얀 우윳빛 면 100% 손수건 크기 정도로 보이는 냅킨이 반듯이 접혀 탑처럼 쌓여 있다.

이건 용도가 뭐예요?

요리학원에서 쓰는 거예요. 칼이나 도마를 닦는 행주나 요리도구를 싸는 보자기 용도로 사용해요. 면이니까 삶아 쓰고 위생적이라 좋지. 보건소에서 점검 나올 때는 이 행주를 꼭 쓰고 있어야 해. 면이 아닌 일회용 쓰면 걸리거든. 예전에는 요릿집에도 다 이 행주를 썼어. 아직 면 행주를 좋아하는 사장님들이 단골이지. 강화도 인견을 떠다가 여름에 여자 속치마, 남자 속바지를 만들어서 파는 데 몇십 년 동안 내가 만든 속옷만 입는 손님이 있어. 나 죽기 전에 미리 챙겨 놓는다고 해마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6장이나 주문해. 그 집 아저씨가 땀이 많은데 내가 만든 런닝 입어보고 다른 집 거는 못 입는대요. 요즘은 옷들이 빨리빨리 나오는데 누가 수선해서 오래 입으려고 하나. 손주 딸을 대학 다닐 때 잠깐 데리고 있었는데 인터넷인가 뭔가로 여러 개 옷 사서 뜯어보지도 않은 택배 상자들이 있더라고.


우리 신랑 얼굴은 결혼식 때 봤어

내가 6남매 중에 막내딸이야. 초등학교도 못 나왔어. 시골에서는 여자들은 많이 배우면 안 된다고 남자들만 학교 보내고 형편 안 좋은 집은 겨우 중학교 보냈지. 어릴 때 커서 뭐가 되고 싶다. 하고 싶다. 꿈도 없었어. 막내딸이라 일도 많이 안 시켰고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면서 놀고 그러다가 21살에 중매로 결혼했지.


데이트 얼마나 하고 결혼하셨어요?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양부모님끼리 만나 상견례하고 날 잡고 결혼식장에서 얼굴 봤지. 그땐 다 그랬어. 4년 동안 고창에서 살다가 26살에 서울로 올라왔어. 남편이 생활력이 없으니까, 당신이 집안 살림 돕고 내가 돈 번다고 역할을 바꾸자고 했어. 지금 생각해도 참 용기가 대단해. 서울 와서 아이 업고 다니면서 돈 벌 생각을 한다니. 남편이 능력은 없어도 성품이 바르고 유순했어요. 그러니까 내 뜻대로 했지. 권위 의식에 깐깐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면 일 못 했을 거야. 큰 싸움도 없이 살았는데 젊었을 때 한번 크게 싸운 적이 있어요. 나한테 무식하다고 해서 나보다 많이 배운 사람이 뭐 해놓은 거 있으면 내놔 보라고 엄청나게 혼냈어. 그 후로는 일절 그런 말실수 안 했어요. 부딪칠 거 같으면 조용히 자리를 피하거나 집 밖으로 나가 바람 쐬고 들어오셨지. 그런 사람이 21년 같이 살다 가버렸어요.


동사무소에 가서 쌀 배급 한번 안 받았어

43세에 혼자되시고 아이들은 많고 재혼할 기회는 없으셨어요?


그런 일이 있어도 아주 칼같이 잘랐어. 외롭고 힘들 겨를도 없이 집에 가면 한숨 자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을 움직여야 먹고 사니까 마음의 여유가 없지. 내가 딱해 보였는지 동에 가면 쌀을 무료로 준다고 도움을 청해보라고 주변 사람들이 말을 해주는데, 귀에 안 들어왔어요. 내가 벌어서 살아야지 절대 구걸은 안 한다고. 시누이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시장 상인들을 회원으로 모아 보라는 거야. 그게 다단계판매였어요. 조카며느리까지 와서 좋은 물건이라고 여러 개 가져와서 써보라고 선물로 주면서 꼬시는데 내가 안 넘어갔어. 공짜로 주는 건 절대 안 쓰고 안 받는다고 오지 말라고 했어. 시누이 식구들은 다단계로 무리하게 돈을 투자하면서 집안 형편이 엉망이 됐어요. 나는 일확천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 안 믿어. 남의 돈 공짜로 먹으면 안 되고 힘 안 들이고 쉽게 벌려고 하면 안 되지. 열심히 내 몸 움직이고 노력해서 벌어야지 그게 젊었을 때부터 내 신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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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이빨이 다 망가졌어

보따리 장사할 때 물건 뺏길까 봐 온 신경을 쓰면 잇몸이 약해져서 이빨이 흔들거렸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어요. 아이들 등록금 내고 생활비를 가지고 있으려면 일수를 얻어서 안 쓸 수가 없었지. 20년은 썼을 거야. 등록금은 3개월마다 나오고 일수는 100일에 끝나는데 열흘 후면 벌써 등록금 내는 날이 오고 장사 수입은 일정하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치아로 갔는지 50대에 하나씩 빠지더라고. 70대에 내 이는 하나도 없고 다 새로 했어요. 아랫니는 임플란트하고 윗니는 틀니하고 임플란트 비쌀 때 해서 1,600만 원이 입안에 들어갔어. 아이들이 다 해줬어요.


지금까지 가게 문 닫아본 역사가 없어

두 번 다쳐서 입원할 때 빼고 가게 문 닫아 본 적이 없어요. 1996년 12월에 넘어지면서 고관절 골절이 돼서 입원했어요. 깁스하고 퇴원했는데 다음 날 목발 짚고 가게에 나왔어. 크리스마스 전 12월이 대목이거든. 포장용 보자기나 면 속옷, 홑청 선물로 주문이 들어오는 때니까. 또 한 번은 여기 가게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80살이었지. 허리 다쳐서 8일 정도 입원했어요. 퇴원하는 날 아들이 집에 데려다주고 당분간 외출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다음날 택시 타고 일하러 나왔지. 가게 문 닫는 동안 홑청(요나 이불 따위의 겉에 씌우는 한 겹으로 된 천) 10피(물건을 담거나 싸는 포대, 가마니, 상자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주문이 들어온 거야. 아침 일찍 나와서 밤늦게까지 작업하고 배달해서 갖다줬지. 내가 그렇게 지독해. 아들이 정말 엄마 못 말린다고 하더라고. 난 시장에 나와야 안 아프고 마음이 편해.


나의 철학

우리 아이들한테 자신을 굳게 믿고 살라고 해요.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가 있는데 부모 자식이라고 어떻게 알겠어요?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내 말에 귀 기울여서 소신껏 살아라 그래야 잘못돼도 남 탓 안 하고 후회도 덜 할 거라고 말해요. 난 고생 고생하면서 살았어도 하나도 후회 안 해요. 우리 아이들 아버지가 돈 못 번다고 싸운 적도 없고 나와 아이들 두고 일찍 갔다고 원망한 적도 없어요. 이 좋은 세상 못 살고 간 사람이 불쌍하지. 내 팔자가 이런가 보다 하고 주어진 대로 되는 대로 살아보자 그랬어요. 나이 들면 종교가 있어야 의지 되고 좋다고 하는데 난 종교도 없어요. 평생 남한테 말로 상처 안 주고 신세 안 지고 신용은 꼭 지키고 나 자신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애써서 그런지 지나간 일을 뒤돌아보며 후회한 적이 없어. 오늘 하루 잘 살아야 후회가 없지. 나는 내일 죽을 일 있어도 오늘 걱정 안 해.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지 왜 미리 걱정하나. 시장 사람들이 내 말이라면 다 신용을 하고 거짓말이라도 참말인 줄 알고 믿어요. 그래도 장사꾼인데 거짓말 한번 안 했겠어? 하하.


어린아이를 업고 단속을 피해 가며 보따리 장사를 하던 23살 젊은 새댁은 66년 후 조그맣고 빼빼한 할머니가 되었다. 그 모습은 그냥 나이 먹은 노인이 아니라 모진 풍파를 다 견뎌낸 차돌 같고 겉은 부드럽고 안은 강인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낸 자국들이 쌓인 얼굴은 고생의 그늘 하나 없는 천진하고 맑은 아이 같다. 긴긴 세월 재봉틀과 한 몸이 되어 7남매를 키워낸 어머니는 물려받은 손재주로 수제품이 하나씩 만들어질 때마다 더 힘을 내어 재봉틀 바늘을 바삐 움직였을 것이다. 2평 남짓한 이름도 없는 작은 공간에 23살 젊은 새댁에게서 오래 발효된 명품 향기가 가득하다. 이곳은 샤넬 넘버 5보다 더 고급스럽고 포근한 향이 나는 낙원 넘버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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