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짜 : 2024년 8월 30일
대 상 : 경운동 덕인당 49년 운영 대표 김유현
장 소 : 덕인당
주 제 : 종로의 공간
나는 북촌, 서촌 일대 동네 골목길 산책을 좋아한다. 오래전 지형대로 있는 좁고 길고 오르막 내리막길을 걸으며 주변 풍경과 집들, 도로변의 다양한 상점과 건물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현지인에서 여행자 모드로 나도 모르게 스위치가 켜진다. 옛것과 새것이 섞여 있고 조화를 이루며 혼재해 있는 것을 보는 재미가 이 동네만의 매력이다. 그 매력은 균형을 이루어야만 유지되는데 재개발과 보존이 함께 가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오래된 상가, 건물, 점포 공간이 어느 순간 사라질 때마다 느낀다. 50년 전통 설렁탕집, 세상의 모든 물건을 파는 만물 가게 철물점, 축하 기념일에 온 식구가 갔던 중국집, 예방주사를 맞으러 갔던 동네 소아과, 좋은 옷을 더 오래 입으려고 수선하러 갔던 옷 수선집. 오랜 시간 동안 동네를 채우던 공간들의 긴 역사만큼 공간의 추억도 깊을 것이다. 영업 종료를 알리는 안내문을 읽을 땐 정든 집을 두고 낯선 곳으로 이사 가는 기분이 든다. 얼마 후 하얀색 공사 가림막이 쳐져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과 새로운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교차한다. 몇 년 전부터 유쾌하게 산책하다가 오래된 점포 앞을 지날 때면 발걸음을 멈추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다. 빨간 도장모형이 가게 문 앞에 귀엽게 서 있고 유리문에는 손조각 인장(印章) 40년이라고 쓰여 있다. 언젠가 예고 없이 사라질지도 모를 이 소중한 공간을 탐구하러 도장집 문을 연다.

1976년에 개업한 덕인당
이 일은 1971년에 교동초등학교 앞에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학교 앞에서 사과 궤짝을 놓고 도장이라고 써 붙이고 노점을 2년 정도 하고 옆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하다가 철거하는 바람에 1976년 길 건너 지금, 이 가게로 왔어요. 서울로 올라와 자리 잡기 전까지는 고생이 많았죠. 고향이 충남 논산인데 8남매 중 장손으로 태어나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 했어요. 부모님 도우며 농사일만 하다가 서울로 먼저 간 동네 친구가 돈 벌려면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오라는 권유에 결혼 후 1968년에 가진 것 없이 맨주먹으로 올라와 홍제동에서 셋방살이하며 고물 장사를 했어요. 요즘은 파지를 모으러 다니는데 그때는 종이박스, 신문지, 고물이 귀해서 강냉이를 퍼주고 샀어요. 그걸 모아서 고물상에 팔면 돈이 좀 생겼죠. 어느 날 무좀에 걸려 걸어 다닐 수가 없어서 열흘간 일을 못 나가고 서울역 뒤에 있는 동네 극장에 가서 하루 종일 영화 구경했던 기억이 나요. 영화는 눈에 안 들어오고 객지에 나와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신세 한탄에 마음이 무거웠죠. 고물 장사는 발이 아파서 그 이후로 못 하게 됐어요.
독학으로 배운 도장 기술
서울행을 권유한 고향 친구가 통인동에서 도장집을 하고 있어서 놀러 갔다가 도장 새기는 걸 보고 이 기술이 있으면 나도 먹고 좀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 말이 재료 원가가 싸고 노력만 하면 수입이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날 이후 쇠톱으로 도장 새기는 칼을 만들어서 책을 사서 보고 연습했어요. 독학을 한 거죠. 남의 작품도 많이 보고 정말 열심히 날마다 연습했죠. 글씨를 거꾸로 새겨야 도장을 찍으면 바로 보이잖아요. 한글도 어려운데 획이 많은 한자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에요. 지금은 손님이 이름 써놓은 걸 보면 획을 어떻게 그을지 칼질은 이렇게 해야겠다. 하고 머릿속에 세밀한 계산으로 그림이 딱 떠오르지. 그렇게 연습해서 교동초등학교 앞에 사과 궤짝 놓고 시작한 게 나의 첫 영업 날이에요. 어느 날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할 무렵 아이들 이름으로 통장 만들어 주는 게 유행이었는지 재동, 교동 초등학교 학부모와 아이들이 와서 도장 만들려고 길게 줄 서서 노상에서 기다리는 진풍경도 있었죠. 노점인데 밖에서 손님들이 서서 기다리는 그런 일도 있었네. 요즘 말로 하면 대박 난 날이지 하하
인장업의 90년대와 현재
지금은 서명을 많이 하지만 그때는 무조건 도장으로 날인을 해야 하던 때라 도장집이 많았어요. 90년대는 인장업 한지 10년이 넘었을 때니 도장 기술자가 됐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고 사업 안정기이니 재미있게 일하고 괜찮았지. 인장연합회에서 종로지회장으로 임명돼서 활동하던 때예요.
종로지회 안에 광화문 지역, 안국지역 포함해서 여섯 동네 지역 분회가 있어서 행사도 많고 활동이 꽤 활발했죠. 종로에 회원 수가 230개 있었고 전국적으로는 연합회에 가입된 인장업체가 8천 개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종로에 정식 가입 회원 수는 10개 정도만 남아 있어서 활동하는 건 없고 전국 인장연합회에서 월간으로 발행하는 소식지로 현황을 알고 있는 정도예요.

49년산 도장 스크랩 노트
49년 된 상호는 직접 지으셨나요 ?
내가 지었죠. 처음에는 ‘우리사’였어요. 손님들이 기억하기 좋고 알아듣기 편할 거 같아서 쓰다가 이 자리로 오면서 덕(德)이 많은 인장의 뜻으로 ‘덕인당’으로 바꿨어요.
그동안 새긴 수많은 도장을 스크랩하신 게 있을까요?
세월의 묵은 때가 켜켜이 쌓인 숙성된 여러 권의 스크랩 노트를 펼치신다.
이게 다 내 작품들이에요. 도장 새기고 나서 여기다 다 찍어 놓은 거야. 주로 인감도장이 많아요. 일반도장 크기보다 큰 것은 박물관이나 투자회사, 큰 기관에서 사용하는 도장이죠. 갤러리, 표구사가 많은 인사동이 옆에 있으니, 미술작품에 찍는 낙관 도장도 많이 새기죠. 나는 전각 전문이에요. 서체에 고인 체, 전서체, 예서체, 행서체, 해서체가 있는데 주로 전서체를 많이 쓰고 나무나 돌, 금에 새기는데 보통 돌에 전서체로 새기는 수제도장을 ‘전각’이라고 해요. 나무 도장은 대추나무로 만든 만 오천 원, 삼만 원, 칠만 원 등 가격대가 다양하고 회양목으로 만든 것도 있고 옛날에는 박달나무를 많이 썼는데 산림 보호수로 정해져 사용 못 하게 된 이후로 중국산을 수입하기 시작한 거야. 이제는 가지고 있는 많은 재료 중에 국산 박달나무는 2개 정도 가지고 있지
직접 디자인한 사장님 표 서체
1997년에서 2001년 4년 동안 일본 관광객이 정말 많이 왔어요. 일본 기자가 취재하고 여행 가이드북에 올려서 그걸 보고 찾아온 거야. 대부분 일본 이름을 한글로 바꿔서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어요. 취향을 물어보고 연구, 디자인해서 주문 제작을 받은 거지. 한글, 알파벳, 문양도 넣고 나만의 창작 작품이 나온 거죠. 손님들 반응도 상당히 좋아서 그때 내가 재미 좀 봤어! 하하
이 정도면 작품 디자이너 이신데요? 하나하나 개성과 특색이 있고 예쁘고 귀여운 서체가 많네요. 혹시 도장작품 전시하신 적이 있나요?
에이 전시는 무슨….
고생 끝에 낙
서울 생활 초반에는 고생이 아주 많았어요. 인장업 수입이 생활의 안정을 줄 정도의 벌이는 아니니까. 그래도 아이들 공부만큼은 제대로 시키려고 서울에 온 거니까 경운동에서 81년에서 91년까지 10년 사는 동안 주변 동네로 10번 이사하면서 교동초등학교, 중앙중, 고등학교를 다녔지. 나중에 경운동에 10평 정도 되는 조그마한 집 하나를 샀어요. 지금도 그 집이 있어요. 아이들 대학 공부 가르칠 때는 프린터기 한 대 사놓고 집사람이 나와서 복사, 팩스 담당해서 일을 도왔어요. 아들 둘이 있는데 대학 졸업은 다 시켰죠. 아이들이 성인이 되니까 짐이 좀 덜어졌고 가게 수입은 그런대로 먹고 살 정도가 됐죠. 매출이 가장 높았던 때가 2000년대 초중반에 관광객이 많이 왔을 때예요. 현찰 만지는 기분이 쏠쏠하더라고. 그래도 난 지금이 제일 좋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홍제동이 재개발해서 새로 올린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아파트로 들어온 지 3년 정도 됐나 노년에 깨끗하고 편한 곳에서 사니 얼마나 좋아. 청소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서 정신적으로도 평온하고 큰돈은 못 벌었어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걸림돌 없고 심신이 두루두루 편안해서 고맙지

도장에서 서명의 시대로
옛날에는 주민센터, 관공서, 기관에 갈 때는 도장은 꼭 챙겨 갔잖아요. 어디를 가든 도장을 찍어야 했거든. 근데 지금은 거의 서명을 해버리지. 그만큼 수요가 많이 줄었어요. 2009년에 인감 제도를 폐지한다는 내용의 ‘인감증명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했고 2012년에 인감증명서의 대체 수단으로 ‘본인서명사실확인서’가 도입됐어요. 본인이 서명했다는 사실을 행정기관이 확인해 주는 제도로 인감증명서와 같은 거죠. 사실 인감증명 제도는 일제의 잔재예요. 인감 쓰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 대만만 쓴다고 하더라고. 아직도 인감증명서 발급받으려면 도장 들고 주민센터에 가야 하잖아요. 올해부터는 인감증명 제도 폐지를 본격적으로 진행한다고 하더라고.
그 시절 덕인당 풍경
이 주변에 건물은 몇 개만 있고 거의 판잣집, 기와집으로 주택이 많았어요. 그 당시 덕인당 옆 2층 하얀색 건물 두 채가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건물이었어요.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 있죠. 천도교 건물인 수운회관은 있었고 길 건너 낙원떡집 전에는 우황청심환을 만든 조선무약 회사가 있었는데 기와집이었죠. 낙원상가 건물이 올라가면서 지상에 있던 낙원시장은 지하로 내려갔고요. 지금은 인도와 도로 가운데 나무도 심고 조경을 잘해 놔서 보기 좋은데 그때는 작은 은행나무 몇 그루 드문드문 있고 포플러 나무를 가로수로 심었어요. 출근하면 내 집 마당에 있는 정원수 가꾸듯이 은행나무에 물을 줬지. 일하다가 창밖에 어마어마하게 커버린 포플러 나무를 보면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묵묵히 지켜보는 동무같아.
나도 지독한 놈이지
부모님 농사일 돕고 동생 뒷바라지하느라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공부를 못 했다고 했잖아요.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3년 정도 배웠어요. 나도 지독한 놈이지 일 끝내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온라인 강의 공부하면서 2012년도에 초, 중, 고 검정고시를 다 패스했어요. 그때 내 나이가 75살 때야 하하
학구열 냄새가 배어 있는 컴퓨터 교육수료증과 합격 증명서를 보여주신다.
열정과 의욕이 대단하신데요. 특별한 건강 비결이 있나요?
새벽 4시 반으로 자명종 맞춰놓으면 그놈이 깨워주지. 일어나서 군대에서 배운 도수 체조를 해요. 30년 하고 있어요. 맨손체조인데 두 차례 정도 하면 30분 정도 걸려. 운동 마치고 교회 새벽기도 갔다가 와서 30분 눈 붙이고 일어나서 7시에 아침 먹고 9시에 출근해요. 일요일은 오후에 2시간 코스로 홍제천을 산책합니다. 오래 걷는 건 일주일에 그렇게 한번 걸어요.
식사는 소식하시나요? 많이 안 먹어요. 원래 소식하셨나요?
옛날 시골에서는 밥그릇보다 더 높게 담아서 먹었어요. 옛날 말로 고봉밥이라고 밥상에 앉으면 밥이 턱에 닿을 정도였으니까. 쌀밥이 아니라 보리밥에 김치 쪼가리로 배를 채우고 일하러 나갔지. 13살부터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녔어요. 논에 가서 논매고 밭에 가서 풀 베고 겨울에는 땔감이 없으니까 20~30리 걸어서 산으로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요.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 앞에 산으로 가는 지게꾼들이 줄 서서 가고 옆줄에는 봄나물 뜯으러 보따리 들고 있는 부인네들이 줄지어 있었지.
6.25 그날 나는 영등포초등학교 4학년
13살 전에는 서울에서 3살 때부터 10년 동안 생활했어요. 아버지가 서울 영등포에서 일하셔서 올라왔는데 13살에 고향 논산으로 다시 내려갔어. 6.25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간 거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여의도 샛강에서 물놀이를 실컷 하고 오후 5시쯤 문래동 집으로 왔을 거야. 언덕 위에 철길이 있었는데 전투기 두 대가 싹 돌더니 기관포를 갈기는 거야. 저녁때가 되니까 군인들이 트럭에 깃발을 꽂고 돌아다니더라고.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갔더니 이은우 선생님이 칠판에 지도를 그려놓고 강릉, 춘천에 북한군이 왔다. 내일부터 학교에 오지 말라 하시는 거야. 그 뒤로 학교를 못 갔어요. 서울은 공산군이 3일 만에 점령해 버렸거든. 그때 아버지가 경찰이셨는데 주재소( 일제 강점기, 순사가 일정한 구역에 머무르면서 사무를 맡아보던 곳)로 끌려가 직사게 얻어맞고 있는데 누가 보증을 해주고 다리 절뚝거리며 나와서 여드레 동안 걸어서 논산으로 피난을 갔지. 어린 동생은 내가 업고 4살 동생은 같이 걷고 아버지는 자전거 끌고 어머니는 보따리 하나 머리에 이고 400리를 8일 동안 걸어갔어요. 한강 다리가 끊어지고 나룻배로 건너는데 여름이니까 시신이 금세 부패하잖아. 다리가 퉁퉁한 송장이 떠내려가는 걸 봤어요.
인터뷰 중에 덕인당 문턱을 자주 드나든 분인 듯 동년배로 보이는 한 분이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우리는 다정한 친구
우리는 몇 십년지기(知己)예요. 동갑이야. 몇 달 있으면 88세 미수(米壽)야. 우리 둘 다 친구들이 넌 왜 안 늙냐, 그래. 술, 담배 안 하고 신앙생활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말벗이 있으니 그러는 거 같아. 자식들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는 게 고마워서인지 2주일에 한 번은 저녁 식사를 대접해요. 시간 내서 부모 찾아오는 게 불편할 때도 있겠지만 늙은이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손주들도 같이 오면 집안이 북적북적 생기가 돌잖아.
친구분이 인터뷰 응원군이 돼 주시려는 듯 한마디 하신다.
“저 양반이 딴 직업을 했으면 이렇게 오래 못했을 거야. 이걸 참 선택을 잘했어. 내가 볼 때 재능이에요. 열심히 연습한다고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늘 와서 볼 때마다 참 신기해요.”
내가 재능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끝까지 파는 끈기는 있지. 그거 한 가지는 있어. 그 한 가지는 자랑하고 싶어요. 그러나저러나 내가 인터뷰를 잘했나 모르겠네. 나이를 먹으니까, 말이 제대로 안 나와요. 말주변도 없는데 생각이 탁탁 안 떠올라. 친구분이 가방에서 뭘 꺼내시더니 건넨다. “이거나 먹어. 우리 집 앞 대추나무에 풋대추가 많이 열렸어. 대추 보고 안 먹으면 쭈글쭈글 늙는대. 어여 먹어 봐.”
인장(印章) : 증명을 위해 문서에 찍을 목적으로 딱딱한 나무나 돌, 옥, 뿔 따위에 개인이나 단체의 이름을 새긴 물건.
내가 성인이 됐다는 기분은 주민증이 나오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셨을 때가 아니라 회사와 관공서, 은행에서 내 이름 석 자를 빨간 인주에 꾹 눌러 찍을 때였던 거 같다. 나를 증명하고 회사를 증명하는 수많은 도장이 49년 동안 덕인당에서 태어났다. 계약할 때 보증할 때 출생하고 사망하고 혼인하고 이혼할 때 지름 18mm 도장 안에 장인의 손길이 담긴 작품이 서류에 찍힐 때 저마다 다양한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내가 재능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끝까지 파는 끈기는 있지. 그거 한 가지는 있어.”
그 훌륭한 끈기 덕분에 앞으로도 ‘덕인당’을 지나 산책할 때면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사장님과 오래오래 눈도장 찍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날 짜 : 2024년 8월 30일
대 상 : 경운동 덕인당 49년 운영 대표 김유현
장 소 : 덕인당
주 제 : 종로의 공간
나는 북촌, 서촌 일대 동네 골목길 산책을 좋아한다. 오래전 지형대로 있는 좁고 길고 오르막 내리막길을 걸으며 주변 풍경과 집들, 도로변의 다양한 상점과 건물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현지인에서 여행자 모드로 나도 모르게 스위치가 켜진다. 옛것과 새것이 섞여 있고 조화를 이루며 혼재해 있는 것을 보는 재미가 이 동네만의 매력이다. 그 매력은 균형을 이루어야만 유지되는데 재개발과 보존이 함께 가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오래된 상가, 건물, 점포 공간이 어느 순간 사라질 때마다 느낀다. 50년 전통 설렁탕집, 세상의 모든 물건을 파는 만물 가게 철물점, 축하 기념일에 온 식구가 갔던 중국집, 예방주사를 맞으러 갔던 동네 소아과, 좋은 옷을 더 오래 입으려고 수선하러 갔던 옷 수선집. 오랜 시간 동안 동네를 채우던 공간들의 긴 역사만큼 공간의 추억도 깊을 것이다. 영업 종료를 알리는 안내문을 읽을 땐 정든 집을 두고 낯선 곳으로 이사 가는 기분이 든다. 얼마 후 하얀색 공사 가림막이 쳐져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과 새로운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교차한다. 몇 년 전부터 유쾌하게 산책하다가 오래된 점포 앞을 지날 때면 발걸음을 멈추는 습관이 생겼다. 오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다. 빨간 도장모형이 가게 문 앞에 귀엽게 서 있고 유리문에는 손조각 인장(印章) 40년이라고 쓰여 있다. 언젠가 예고 없이 사라질지도 모를 이 소중한 공간을 탐구하러 도장집 문을 연다.
이 일은 1971년에 교동초등학교 앞에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학교 앞에서 사과 궤짝을 놓고 도장이라고 써 붙이고 노점을 2년 정도 하고 옆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하다가 철거하는 바람에 1976년 길 건너 지금, 이 가게로 왔어요. 서울로 올라와 자리 잡기 전까지는 고생이 많았죠. 고향이 충남 논산인데 8남매 중 장손으로 태어나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 했어요. 부모님 도우며 농사일만 하다가 서울로 먼저 간 동네 친구가 돈 벌려면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오라는 권유에 결혼 후 1968년에 가진 것 없이 맨주먹으로 올라와 홍제동에서 셋방살이하며 고물 장사를 했어요. 요즘은 파지를 모으러 다니는데 그때는 종이박스, 신문지, 고물이 귀해서 강냉이를 퍼주고 샀어요. 그걸 모아서 고물상에 팔면 돈이 좀 생겼죠. 어느 날 무좀에 걸려 걸어 다닐 수가 없어서 열흘간 일을 못 나가고 서울역 뒤에 있는 동네 극장에 가서 하루 종일 영화 구경했던 기억이 나요. 영화는 눈에 안 들어오고 객지에 나와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신세 한탄에 마음이 무거웠죠. 고물 장사는 발이 아파서 그 이후로 못 하게 됐어요.
독학으로 배운 도장 기술
서울행을 권유한 고향 친구가 통인동에서 도장집을 하고 있어서 놀러 갔다가 도장 새기는 걸 보고 이 기술이 있으면 나도 먹고 좀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 말이 재료 원가가 싸고 노력만 하면 수입이 괜찮다고 하더라고. 그날 이후 쇠톱으로 도장 새기는 칼을 만들어서 책을 사서 보고 연습했어요. 독학을 한 거죠. 남의 작품도 많이 보고 정말 열심히 날마다 연습했죠. 글씨를 거꾸로 새겨야 도장을 찍으면 바로 보이잖아요. 한글도 어려운데 획이 많은 한자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에요. 지금은 손님이 이름 써놓은 걸 보면 획을 어떻게 그을지 칼질은 이렇게 해야겠다. 하고 머릿속에 세밀한 계산으로 그림이 딱 떠오르지. 그렇게 연습해서 교동초등학교 앞에 사과 궤짝 놓고 시작한 게 나의 첫 영업 날이에요. 어느 날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할 무렵 아이들 이름으로 통장 만들어 주는 게 유행이었는지 재동, 교동 초등학교 학부모와 아이들이 와서 도장 만들려고 길게 줄 서서 노상에서 기다리는 진풍경도 있었죠. 노점인데 밖에서 손님들이 서서 기다리는 그런 일도 있었네. 요즘 말로 하면 대박 난 날이지 하하
인장업의 90년대와 현재
지금은 서명을 많이 하지만 그때는 무조건 도장으로 날인을 해야 하던 때라 도장집이 많았어요. 90년대는 인장업 한지 10년이 넘었을 때니 도장 기술자가 됐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고 사업 안정기이니 재미있게 일하고 괜찮았지. 인장연합회에서 종로지회장으로 임명돼서 활동하던 때예요.
종로지회 안에 광화문 지역, 안국지역 포함해서 여섯 동네 지역 분회가 있어서 행사도 많고 활동이 꽤 활발했죠. 종로에 회원 수가 230개 있었고 전국적으로는 연합회에 가입된 인장업체가 8천 개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종로에 정식 가입 회원 수는 10개 정도만 남아 있어서 활동하는 건 없고 전국 인장연합회에서 월간으로 발행하는 소식지로 현황을 알고 있는 정도예요.
49년산 도장 스크랩 노트
49년 된 상호는 직접 지으셨나요 ?
내가 지었죠. 처음에는 ‘우리사’였어요. 손님들이 기억하기 좋고 알아듣기 편할 거 같아서 쓰다가 이 자리로 오면서 덕(德)이 많은 인장의 뜻으로 ‘덕인당’으로 바꿨어요.
그동안 새긴 수많은 도장을 스크랩하신 게 있을까요?
세월의 묵은 때가 켜켜이 쌓인 숙성된 여러 권의 스크랩 노트를 펼치신다.
이게 다 내 작품들이에요. 도장 새기고 나서 여기다 다 찍어 놓은 거야. 주로 인감도장이 많아요. 일반도장 크기보다 큰 것은 박물관이나 투자회사, 큰 기관에서 사용하는 도장이죠. 갤러리, 표구사가 많은 인사동이 옆에 있으니, 미술작품에 찍는 낙관 도장도 많이 새기죠. 나는 전각 전문이에요. 서체에 고인 체, 전서체, 예서체, 행서체, 해서체가 있는데 주로 전서체를 많이 쓰고 나무나 돌, 금에 새기는데 보통 돌에 전서체로 새기는 수제도장을 ‘전각’이라고 해요. 나무 도장은 대추나무로 만든 만 오천 원, 삼만 원, 칠만 원 등 가격대가 다양하고 회양목으로 만든 것도 있고 옛날에는 박달나무를 많이 썼는데 산림 보호수로 정해져 사용 못 하게 된 이후로 중국산을 수입하기 시작한 거야. 이제는 가지고 있는 많은 재료 중에 국산 박달나무는 2개 정도 가지고 있지
직접 디자인한 사장님 표 서체
1997년에서 2001년 4년 동안 일본 관광객이 정말 많이 왔어요. 일본 기자가 취재하고 여행 가이드북에 올려서 그걸 보고 찾아온 거야. 대부분 일본 이름을 한글로 바꿔서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어요. 취향을 물어보고 연구, 디자인해서 주문 제작을 받은 거지. 한글, 알파벳, 문양도 넣고 나만의 창작 작품이 나온 거죠. 손님들 반응도 상당히 좋아서 그때 내가 재미 좀 봤어! 하하
이 정도면 작품 디자이너 이신데요? 하나하나 개성과 특색이 있고 예쁘고 귀여운 서체가 많네요. 혹시 도장작품 전시하신 적이 있나요?
에이 전시는 무슨….
고생 끝에 낙
서울 생활 초반에는 고생이 아주 많았어요. 인장업 수입이 생활의 안정을 줄 정도의 벌이는 아니니까. 그래도 아이들 공부만큼은 제대로 시키려고 서울에 온 거니까 경운동에서 81년에서 91년까지 10년 사는 동안 주변 동네로 10번 이사하면서 교동초등학교, 중앙중, 고등학교를 다녔지. 나중에 경운동에 10평 정도 되는 조그마한 집 하나를 샀어요. 지금도 그 집이 있어요. 아이들 대학 공부 가르칠 때는 프린터기 한 대 사놓고 집사람이 나와서 복사, 팩스 담당해서 일을 도왔어요. 아들 둘이 있는데 대학 졸업은 다 시켰죠. 아이들이 성인이 되니까 짐이 좀 덜어졌고 가게 수입은 그런대로 먹고 살 정도가 됐죠. 매출이 가장 높았던 때가 2000년대 초중반에 관광객이 많이 왔을 때예요. 현찰 만지는 기분이 쏠쏠하더라고. 그래도 난 지금이 제일 좋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홍제동이 재개발해서 새로 올린 아파트에서 살고 있어요. 아파트로 들어온 지 3년 정도 됐나 노년에 깨끗하고 편한 곳에서 사니 얼마나 좋아. 청소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서 정신적으로도 평온하고 큰돈은 못 벌었어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걸림돌 없고 심신이 두루두루 편안해서 고맙지
도장에서 서명의 시대로
옛날에는 주민센터, 관공서, 기관에 갈 때는 도장은 꼭 챙겨 갔잖아요. 어디를 가든 도장을 찍어야 했거든. 근데 지금은 거의 서명을 해버리지. 그만큼 수요가 많이 줄었어요. 2009년에 인감 제도를 폐지한다는 내용의 ‘인감증명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했고 2012년에 인감증명서의 대체 수단으로 ‘본인서명사실확인서’가 도입됐어요. 본인이 서명했다는 사실을 행정기관이 확인해 주는 제도로 인감증명서와 같은 거죠. 사실 인감증명 제도는 일제의 잔재예요. 인감 쓰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 대만만 쓴다고 하더라고. 아직도 인감증명서 발급받으려면 도장 들고 주민센터에 가야 하잖아요. 올해부터는 인감증명 제도 폐지를 본격적으로 진행한다고 하더라고.
그 시절 덕인당 풍경
이 주변에 건물은 몇 개만 있고 거의 판잣집, 기와집으로 주택이 많았어요. 그 당시 덕인당 옆 2층 하얀색 건물 두 채가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건물이었어요. 지금도 그때 모습 그대로 있죠. 천도교 건물인 수운회관은 있었고 길 건너 낙원떡집 전에는 우황청심환을 만든 조선무약 회사가 있었는데 기와집이었죠. 낙원상가 건물이 올라가면서 지상에 있던 낙원시장은 지하로 내려갔고요. 지금은 인도와 도로 가운데 나무도 심고 조경을 잘해 놔서 보기 좋은데 그때는 작은 은행나무 몇 그루 드문드문 있고 포플러 나무를 가로수로 심었어요. 출근하면 내 집 마당에 있는 정원수 가꾸듯이 은행나무에 물을 줬지. 일하다가 창밖에 어마어마하게 커버린 포플러 나무를 보면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묵묵히 지켜보는 동무같아.
나도 지독한 놈이지
부모님 농사일 돕고 동생 뒷바라지하느라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공부를 못 했다고 했잖아요.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3년 정도 배웠어요. 나도 지독한 놈이지 일 끝내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온라인 강의 공부하면서 2012년도에 초, 중, 고 검정고시를 다 패스했어요. 그때 내 나이가 75살 때야 하하
학구열 냄새가 배어 있는 컴퓨터 교육수료증과 합격 증명서를 보여주신다.
열정과 의욕이 대단하신데요. 특별한 건강 비결이 있나요?
새벽 4시 반으로 자명종 맞춰놓으면 그놈이 깨워주지. 일어나서 군대에서 배운 도수 체조를 해요. 30년 하고 있어요. 맨손체조인데 두 차례 정도 하면 30분 정도 걸려. 운동 마치고 교회 새벽기도 갔다가 와서 30분 눈 붙이고 일어나서 7시에 아침 먹고 9시에 출근해요. 일요일은 오후에 2시간 코스로 홍제천을 산책합니다. 오래 걷는 건 일주일에 그렇게 한번 걸어요.
식사는 소식하시나요? 많이 안 먹어요. 원래 소식하셨나요?
옛날 시골에서는 밥그릇보다 더 높게 담아서 먹었어요. 옛날 말로 고봉밥이라고 밥상에 앉으면 밥이 턱에 닿을 정도였으니까. 쌀밥이 아니라 보리밥에 김치 쪼가리로 배를 채우고 일하러 나갔지. 13살부터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녔어요. 논에 가서 논매고 밭에 가서 풀 베고 겨울에는 땔감이 없으니까 20~30리 걸어서 산으로 나뭇가지를 주으러 가요.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 앞에 산으로 가는 지게꾼들이 줄 서서 가고 옆줄에는 봄나물 뜯으러 보따리 들고 있는 부인네들이 줄지어 있었지.
6.25 그날 나는 영등포초등학교 4학년
13살 전에는 서울에서 3살 때부터 10년 동안 생활했어요. 아버지가 서울 영등포에서 일하셔서 올라왔는데 13살에 고향 논산으로 다시 내려갔어. 6.25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간 거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여의도 샛강에서 물놀이를 실컷 하고 오후 5시쯤 문래동 집으로 왔을 거야. 언덕 위에 철길이 있었는데 전투기 두 대가 싹 돌더니 기관포를 갈기는 거야. 저녁때가 되니까 군인들이 트럭에 깃발을 꽂고 돌아다니더라고.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갔더니 이은우 선생님이 칠판에 지도를 그려놓고 강릉, 춘천에 북한군이 왔다. 내일부터 학교에 오지 말라 하시는 거야. 그 뒤로 학교를 못 갔어요. 서울은 공산군이 3일 만에 점령해 버렸거든. 그때 아버지가 경찰이셨는데 주재소( 일제 강점기, 순사가 일정한 구역에 머무르면서 사무를 맡아보던 곳)로 끌려가 직사게 얻어맞고 있는데 누가 보증을 해주고 다리 절뚝거리며 나와서 여드레 동안 걸어서 논산으로 피난을 갔지. 어린 동생은 내가 업고 4살 동생은 같이 걷고 아버지는 자전거 끌고 어머니는 보따리 하나 머리에 이고 400리를 8일 동안 걸어갔어요. 한강 다리가 끊어지고 나룻배로 건너는데 여름이니까 시신이 금세 부패하잖아. 다리가 퉁퉁한 송장이 떠내려가는 걸 봤어요.
인터뷰 중에 덕인당 문턱을 자주 드나든 분인 듯 동년배로 보이는 한 분이 스스럼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우리는 다정한 친구
우리는 몇 십년지기(知己)예요. 동갑이야. 몇 달 있으면 88세 미수(米壽)야. 우리 둘 다 친구들이 넌 왜 안 늙냐, 그래. 술, 담배 안 하고 신앙생활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말벗이 있으니 그러는 거 같아. 자식들이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는 게 고마워서인지 2주일에 한 번은 저녁 식사를 대접해요. 시간 내서 부모 찾아오는 게 불편할 때도 있겠지만 늙은이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손주들도 같이 오면 집안이 북적북적 생기가 돌잖아.
친구분이 인터뷰 응원군이 돼 주시려는 듯 한마디 하신다.
“저 양반이 딴 직업을 했으면 이렇게 오래 못했을 거야. 이걸 참 선택을 잘했어. 내가 볼 때 재능이에요. 열심히 연습한다고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늘 와서 볼 때마다 참 신기해요.”
내가 재능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끝까지 파는 끈기는 있지. 그거 한 가지는 있어. 그 한 가지는 자랑하고 싶어요. 그러나저러나 내가 인터뷰를 잘했나 모르겠네. 나이를 먹으니까, 말이 제대로 안 나와요. 말주변도 없는데 생각이 탁탁 안 떠올라. 친구분이 가방에서 뭘 꺼내시더니 건넨다. “이거나 먹어. 우리 집 앞 대추나무에 풋대추가 많이 열렸어. 대추 보고 안 먹으면 쭈글쭈글 늙는대. 어여 먹어 봐.”
인장(印章) : 증명을 위해 문서에 찍을 목적으로 딱딱한 나무나 돌, 옥, 뿔 따위에 개인이나 단체의 이름을 새긴 물건.
내가 성인이 됐다는 기분은 주민증이 나오고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셨을 때가 아니라 회사와 관공서, 은행에서 내 이름 석 자를 빨간 인주에 꾹 눌러 찍을 때였던 거 같다. 나를 증명하고 회사를 증명하는 수많은 도장이 49년 동안 덕인당에서 태어났다. 계약할 때 보증할 때 출생하고 사망하고 혼인하고 이혼할 때 지름 18mm 도장 안에 장인의 손길이 담긴 작품이 서류에 찍힐 때 저마다 다양한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내가 재능이 있는 건지 모르지만 끝까지 파는 끈기는 있지. 그거 한 가지는 있어.”
그 훌륭한 끈기 덕분에 앞으로도 ‘덕인당’을 지나 산책할 때면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사장님과 오래오래 눈도장 찍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