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혜화동에 산 지 어언 67년이라... (기록 : 조영남)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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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명 : 혜화동에 산 지 어언 67년이라

날짜 : 2024년 9월 13일

대상 : 혜화동 주민 최삼용

장소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5-116

주제 : 종로의 어른(노인)

기록가 :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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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장성군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에 가는데 4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형과 누나들이 도시로 출타하는 바람에 늙으신 어머님을 모셔야 하기도 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돈도 없어서 중학교에 진학을 못 했어요. 그리고 기술을 배웠지요. 그 기술이라는 게 양철( 주석을 입힌 얇은 철판)이라는 재료로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받이를 만들어서 다는 기술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기능성만을 중요시해서 물받이 역할만 하는 그런 단순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저는 조금 다른 모양으로 오리주둥이 모양을 만들어서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이 오리주둥이로 쏟아져 나오게 하는 방법으로도 만들어보고, 황새가 날아가는 모양으로도 만들기도 하고, 또 닭의 볏 모양을 만들어서 장식을 해보기도 했더니 집을 지으시는 분들이 참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그런 예쁜 모양으로 지붕의 물받이를 만들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우리 고향에서 도시에 나가 그런 집 짓는 건축일을 하는 분이 소문을 듣고선 그런 좋은 기술로 서울에 올라와서 일을 같이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같이 한번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그러더군요.



그 말만 믿고 서울에 올라와 그분을 따라 공사 현장을 다니면서 일을 열심히 했어요. 나중에는 돈이 좀 벌리기도 해서 시골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서울로 올라오시게 해서 제가 모시면서 어머님이 밥을 해주시면 그 맛있는 밥을 먹고 나가서 열심히 일만 했어요. 처음 서울에 올라온 해가 1957년이었어요. 내 나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였지요. 아마 호적에는 열다섯 살로 되어있을 때였어요. 그때는 형과 누나들이 있었고 또 어머니께서 늦은 나이에 저를 막내로 낳으셨기 때문에 홍역이나 무슨 돌림병 같은 거에 걸리면 어린애들이 많이 죽기도 하고 그런 시절이었기에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호적에 바로 이름을 올리지 않고 2년 동안 기다리다가 그때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까 그제야 호적에 올려서 두 살이나 적게 호적상 나이가 된 거지요. 서울에 올라올 때가 자유당 시절이었어요. 처음에 서울에 와서 살기 시작한 동네가 혜화동 110번지였어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혜화동 로터리에 육교가 있었는데, 그 육교 바로 옆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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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터를 잡고 건축 현장에 다니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기술로 일을 했어요. 양철 또는 함석이라고도 하는데 그 재료로 지붕의 물받이를 직접 만들어서 지붕에 매달아주면서 집 한 채를 마무리하는 작업이었어요. 그때는 한옥 지붕에도 물받이를 달아서 날아갈 듯이 황새가 앉아 있는 모양도 있었고, 오리주둥이에서 빗물이 콸콸 흘러나오면 걸 보면서 사람들이 색다르다는 듯 쳐다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한옥 지붕은 물론 양옥집의 처마에도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받으려고 그런 물받이 챙이라는 것을 설치했었지요.

 너무 추운 겨울이거나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 너무 더워서 건축일을 할 수 없는 기간만 빼고는 쉴 새 없이 일을 했어요. 저한테 그런 소질이 있는 건지 취미가 그거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일을 한다는 게 참 재미있었고 그때만 해도 젊은 나이여서 그랬던 건지 하여튼 힘든 줄도 모르고 일을 했어요. 집에 가면 어머님이 계셨고 유난히 막내아들이라고 이뻐해 주시고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해주시면서 보살펴주시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참 행복한 시절이었지요. 그러다가 스물일곱 살이 되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고향에 있는 처녀와 선을 보게 되었어요. 같이 일하던 사람이 지금 집사람의 형부가 되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중매한 거였어요. 그쪽에서는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왔냐고 군대 제대를 하고 나서 결혼하자고 했는데 저희 어머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하니까 얼른 결혼부터 해야 한다고 우기셔서 고향 처녀와 결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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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신혼살림도 여기 혜화동에서 차리고 오늘까지 67년 동안 사는 겁니다. 그동안 혜화동에 살면서 참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시절부터 4, 19도 겪었고, 5, 16도 겪었어요.

4, 19 때 혜화동 로터리에서부터 학생들이 한 무리의 떼를 지어 밀고 나가서 당시의 종로경찰서(지금은 혜화경찰서지만)가 종로4가에 있었는데 거기에서 총을 쏴대는 바람에 학생들이고 일반 시민들이고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어요. 저는 무서워서 그때 당시에 데모대나 그런 곳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창경궁 앞에까지 따라가서 직접 목격했어요. 그때 시발택시가 다녔는데 그 시발택시 지붕 위에다 학생들의 시체를 싣고서 보란 듯이 막 돌아다니고 그랬어요. 내가 일하던 장소가 수도병원이었어요. 나중에 우석대학교 병원이 되었다가 고려대병원이 되었고 그 고려대병원이 안암동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아남아파트가 지어졌어요. 바로 그 자리가 제가 일하던 자리였어요. 거기가 바로 시체실이 되었어요. 야전침대 하나 가져다 놓고 시체를 쌓아놨는데 학생도 있었고 일반인도 있었고 어린애도 있었어요. 야전침대 위에 시체를 쌓아놓고 홑이불을 덮어놨는데 덮어 놓은 홑이불 사이로 죽은 사람의 손이 삐죽 튀어나와 있고 다리는 뻗친 그대로 홑이불 밖으로 나와 있고, 늘어져 있는 시체도 있고 그런 걸 다 보았어요. 우리도 잘못하다가는 끌려갈 뻔했어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옆에 서 있던 아저씨는 잘못해서 혜화동 로터리에서 잡혀가는 걸 봤어요.

나중에 끌려갔던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감옥살이하다가 나중에 풀려나왔다는 소문도 있었고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뒤숭숭한 소문이 무성하게 돌아다니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절이었어요. 명륜동에서 성균관대생들이 떼를 지어 함성을 지르면서 뛰쳐나오면 서울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나와서 합류하고 또 저 아래쪽에서는 고려대에서 학생들이 몰려나와서 마치 큰 강물이 되어서 학생들이 홍수가 난 강의 큰 물살처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거기다가 최루탄을 쏘아대는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 연기만 쐬면 콧물에다가 얼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겁고 집안에 들어가서 숨어있어 보아도 창문으로 들어와서 나중에 물로 외벽이며 창문이며 마당도 물로 다 씻어내고 그랬어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이 동네를 떠날 생각을 안 하고, 67년 동안이나 이렇게 살고 있어요.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혜화동이 너무 좋아서 그랬는지 저도 잘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여기 혜화동에서 집 장만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태어나고 했으니, 가장으로서 내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때쯤 마침 서울대학교가 이전한다는 소문이 났었고 그 학교가 있던 자리를 시민들에게 분양한다는 공고가 났어요. 그래서 우리 집을 장만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땅값을 알아봤는데 한 평에 15만 원인가 그 이상으로 비싸게 분양한다고 해요. 가장 싸게 분양하는 땅이 13만 5천 원인가 그랬어요. 그 가격도 우리한테는 비쌌지요. 그때 쌀 한 가마니가 5, 6천 원 정도 했을 때니까요. 지금은 그때 그 땅이 한 평에 1억 원 한다는 소문도 있고 그렇던데, 다 부자들을 위한 제도였던 거 같아요. 그때 당시에는 집 한 채 값이 100만 원에도 살 수 있는 데도 있었는데, 돈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그 땅을 분양받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사글세로 살면서 이사를 여러 번 했어요. 좀 더 집값이 싼 저 북쪽 동네로 이사를 가볼까도 생각해 봤는데 이 자리에서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 왔다 갔다 하면서 차비도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그렇잖아요.



제가 결혼하기 전에 잠깐이었지만, 구로동에 가서 6개월 살아봤어요. 직장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어요. 그때 돈을 좀 벌어서 결혼했으니까요. 처음으로 사글세 집을 장만한 동네가 와룡동 성균관대 후문이었어요.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조금씩 넓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집세를 올려주고 또 이사하면서 그동안 번 돈으로 집세를 또 올려주고 그러다가 아는 사람이 안양의 체비지 땅을 사놓으면 그 땅이 개발될 거라고 해서 집 장만보다 땅을 먼저 샀어요. 계약금 80만 원만 주면 된다고 해서 계약을 했는데 분양금액이 총 800만 원이었어요. 계약금만 걸어놨는데 마침 투기 열풍이 불어서 그 땅을 1,600만 원을 준다고 팔라고 하고 또 1,800만 원을 준다고 팔라고 하고 그랬대요. 그때 나는 마산에 건축 현장에 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집사람이 놀라서 마산까지 내려왔어요. 땅값을 두 배로 준다고 하는데 팔아야 하느냐고 물어보려고 왔더라고요. 그때는 전화도 없고 하니까 연락할 수가 없으니까 그 먼 길을 마산까지 내려온 거지요. 그래서 그 땅을 팔아서 처음으로 와룡동에다가 내 집을 장만을 했어요.


그 이후에도 혜화동 한옥을 사서 그 한옥에 살다가 또 팔고 동숭동에 교회 건물을 판다고 해서 그 집을 사보려고 했더니 불교 믿는 사람이 교회 건물에 살면 안 된다고 집사람이 반대해서 못 샀어요. 그 집터가 지금은 대학로 대로변이 됐어요. 대학로의 도로를 확장한다고 앞에 있던 집들을 수용해서 다 뜯어내고 도로를 넓히는 바람에 그 뒤에 있던 집이 도로변으로 나오게 된 거지요. 지금은 그때 그 땅에 빌딩이 세워져 있어요. 그때 그 집만 샀으면 부자가 되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생길 때가 가끔 있어요. 그래서 다른 한옥 기와집을 샀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업고 집을 보러 다니니까 좀 불쌍해 보였는지 아기를 봐서 집주인이 2천만 원짜리 집인데 50만 원 깎아줬어요. 대지가 30평이니까 건평은 15평이나 되었나? 집이 작았어요. 아이들은 넷인데 집이 좁았지만, 그래도 내 집이니까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그 집에서 몇 년을 잘 살았어요.

그러다가 좀 넓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볼까 했는데 우리 집사람과 이 집의 안주인이 친구였어요. 캐나다 유학을 다녀오신 숙명여대 건축가 유한태 교수님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 위해 이 집을 아주 멋있고 튼튼하게 잘 지어서 이 집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마당도 있고 대지도 53평이어서 넓고요. 내가 가진 기술로 리모델링하고 나서 지금까지 20년 넘게 이렇게 살고 있어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그 모은 돈으로 집 장만을 하고 또 일해서 돈을 모아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고 그러면서 살다 보니 이렇게 나이가 많아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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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집에서 이사 온 지도 어언 27년이 되었어요. 여기에 살면서 좋은 일도 참 많았어요. 바로 옆에 있는 혜화초등학교에 다니던 우리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독립해 나가서 잘살고 있고요. 혜화초등학교도 학생들이 줄어들어서 100여 명밖에 안 된다고 해요. 우리 애들이 다닐 때는 학생 숫자가 너무 많아서 담장 너머로 쳐다보면 운동장에 학생들이 새카맣게 줄을 서서 아침 조회를 하고 가을 운동회 할 때는 주변의 길거리가 꽉 메워질 정도로 학부모와 학생들이 많이 몰려다니고 만국기가 펄럭거리고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몰려와서 골목이 꽉 차게 장난감 같은 물건을 팔기도 하고 그랬는데, 소문인지 몰라도 이제 곧 혜화초등학교는 폐교가 될 거라고 해요. 몇 명 남는 학생들은 동숭동에 있는 서울사대 부속 초등학교로 통폐합될 거라고 하더군요. 이 집도 이제 낡고, 우리 내외도 나이가 많고 그래서 이 집을 팔아 작은집으로 옮기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쉽게 팔리지를 않네요. 우리가 이 집을 살 때만 해도 이 주변은 여기가 거의 한옥 기와집이었어요. 우리 집만 새로 2층으로 지어서 우뚝하니 번듯하고 아주 멋있었어요. 지금은 그 많던 한옥을 다 허물고 빌라나 원룸을 지었어요.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에게 세를 놓으면 월세 수익이 나오고 집주인도 그 집에 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들 많이 하지요. 지금은 기와집이 거의 안 보이잖아요.



 67년 동안 명륜동 혜화동, 이 동네 주변에 살면서 사글세 이사는 수도 없이 많이 했었고, 집을 사서 이사 다닌 건 네 번이었지만, 내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쪽방에서 사글세도 살아보고 문간방에서도 살아보고 그런저런 여러 형태의 집에 살아보면서 설비업체도 운영하고 혜화동 4통 통장 일을 오랫동안 맡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서울시장 공관에 사시던 시장님도 직접 만나고 인구조사나 적십자 회비 걷으러 집에 찾아가기도 하고 불우이웃 돕기 성금 내셔야 한다고 전달하러 찾아가고 그랬어요. 그러면 가끔은 사모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시고 과일이나 차를 대접받기도 하고 그랬지요.

반상회 할 때도 주민들을 초대해서 고건 시장님이 직접 참석하셔서 이웃들과 함께 다과도 즐기면서 담소도 하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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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혜화동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어요. 예전엔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이 이웃에 살았는데 그 사람이 꿀을 통으로 선물을 받았는데 그 뚜껑을 딸 줄을 모른다고 나한테 따 달라고 해서 뚜껑을 따 줬더니 꿀을 제법 나누어 주었어요. 그 꿀을 먹어보니 맛있어서 너무 많이 먹었던가 봐요. 그 부작용인지 좋은 효과인지 한겨울에 눈이 펑펑 오는데도 나는 속옷만 입고 찬 바람이 부는 길을 자전거 타고 막 달리고 그러면서도 추운 줄을 몰랐어요. 속에서 열이 펄펄 나서 일 년 동안 그렇게 건강하게 지냈던 거 같아요. 내가 설비 일을 하니까 직접 집으로 가서 설비도 해주고 집안에 고칠 것들이 있으면 고쳐주고 그런 일도 했으니까 그런 유명한 사람들의 집을 많이 드나들게 되었지요.

장면 박사님 댁에도 연탄난로 시공해 드리러 가보고, 그때 알게 된 사모님께서 집안에 뭐든지 고칠 게 있으면 저를 불렀어요. 참 좋은 분들인데 첫째 아들인가 일찍 잃으시고 따님이 수녀가 되었고 그렇다고 얘기해주셨어요. 김상엽 총리님도 이웃에 사셨는데 그 집에도 부르면 가서 파이프도 고쳐주고 누수가 생겼다고 해서 배관을 바꾸어 시공도 해주고 그랬어요. 그분 장모님도 바로 우리 아래 집에 사셔서 저를 믿고 타일이 떨어졌다고 붙여 달라고 하면 바로 가서 타일 시공해 주고 뭐든지 일이 있으면 불러서 고쳐 달라고 하고 그랬어요. 삼양사 회장님 집도 있었고 효성그룹 회장님 저택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어요. 사모님만 여기에 거주하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는 거 같아요. 그 저택은 기념관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이제 나이가 많고 힘들어서 설비업도 그만두고 통장 일도 장년이라고 그만하고 쉬고 있는데 한생연에서 처음에는 주차나 경비 일을 해달라고 해서 집도 가깝고 평생 일만 하던 사람이 모든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으니까 오히려 몸이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취직이라는 것을 했어요.


한생연이라는 곳은 융합 교육 과학관이라고 해서 과학을 잘하고 좋아하는 학생들이 캠프에 참가해서 생물 실험이나 과학탐험을 직접 체험해 보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교육기관인데 처음에는 여기 명륜동에서만 시작했고, 여기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목동에도 있고, 잠실에도 있고, 분당에도 생겼고 여기저기 분점 형태로 많이 생겨났어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거라는 기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실험하는 어린 학생들이 많이 와서 공부하는 교육기관인데 그곳에서는 요즘은 메추리를 키우기 체험을 하고 있어요. 메추리 키울 때도 그렇고 생물 실험을 하면 도구가 필요하잖아요. 그런 작은 도구를 제가 직접 창작하듯이 만들어서 가져다주면 다이소에서 사는 것보다 더 튼튼하고 좋다고 해요. 제가 설비 일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 이외도 잔잔하게 고장 나는 거 있으면 고쳐주고 또 집이 가까우니까 언제든지 필요하면 바로 달려갈 수도 있으니까 저는 편하고 좋은데 한생연에서도 필요할 때 쉽게 부를 수 있으니까 편하겠지요.



한생연에 처음에 제가 근무할 때는 주차요원이나 경비원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지금은 다 퇴직하고 저만 남아서 근무하고 있어요. 아마도 제가 맡은 업무 이외에도 다른 일도 함께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나이가 많은데도 저만 해고를 안 하고 계속 일을 하도록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나이가 나처럼 80이 넘었는데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아마 흔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실제 나이가 더 많은데, 호적에 늦게 등록되는 바람에 그 덕을 보는 거 같기도 하네요.


혜화동 집의 마당에서 대문을 활짝 열어놓으시고 정원의 나무를 자르고 꽃나무들을 돌보고 손질하고 계시던 최삼용 님께 분께 인터뷰를 요청했는데도 선뜻 응해주신 점도 고마운 마음 전해드리고 싶고 또 쉬지 않고 혜화동 명륜동의 많은 이야기를 해주신 ‘종로의 어른’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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