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속공예 작가이며 국민대학교 금속공예과 명예 교수님으로 재직하시며, 집을 직접 설계하고 지어서 갤러리와 카페 소연을 운영하고 계시는 김승희 작가를 만나보았다.
‘소연’은 작은 자연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제가 대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는 금속공예과라는 전공과목이 아예 개설되어 있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그때 철이 없었고, 정보도 없어서 그냥 막연하게 미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소망하나를 가지고 미술대학에 입학했어요. 65학번인데 그 해에 갑자기 서울대학교에 혜성처럼 응용미술학과라는 전공이 새로 생겼어요. 그때 생각에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기보다 응용미술을 전공하면 내가 내 맘대로 응용해서 재미있는 작품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그게 제 성격과 맞을 것도 같아서 응용미술과를 지원했어요. 동숭동에 캠퍼스가 있었는데, 법과대학 맞은편에 낡고, 형편없는 창고 같은 건물이 미술대학이라고 했어요.
서울대학교라고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도 있을 줄 알았는데 창고처럼 지저분하고 초라하고 형편없는 캠퍼스에 실망스럽기도 했어요. 그때는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의 건물이 몇 채 없었어요. 미술대학에서의 수업 내용이 서예도 배우고, 사진도 배우고, 데생 수업도 하고 뭐 그런 기초적인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도록 개설해 놓았더라고요. 아마 1학년이니까 그런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을 하게 했었던 것 같아요. 2학년이 되면서 전공을 공업디자인과 상업디자인과 중에 선택해야 하는데, 상업디자인은 규격이 딱딱 맞게 자로 재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그러는 건 내 성격과 안 맞을 거 같아서 좀 더 틀에 짜여 있지 않고 자유로운 공업디자인을 전공하겠다고 했어요. 일 년 동안 공업디자인을 공부해 봤는데 별로 흥미가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명동이나 종로 시내로 놀러 다니기만 하고 그랬어요. 3학년에 올라가서 디자인과와 공예과로 전공이 또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때 생각에 공예과가 좀 자유롭고 허술해 보여서 공예과를 전공으로 선택했어요.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어요.
박 대통령이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의지가 강하셔서 서울대 미대 디자인과에 대해 매우 관심이 높았어요.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디자인산업이 중요하다고 특별하게 도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가마를 학교 캠퍼스 안에다 만들어 주셨어요. 벽돌을 쌓아서 가마를 만들었는데 전기가 아니고 장작을 때야 하는 가마였던 거 같아요. 공예과는 흙을 만져서 그릇을 만드는 거였는데 공예과 실기실(스튜디오)은 함석으로 지붕을 얹어서 지었는데 건물이 허술해서 그런지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거기에서 작업은커녕 그곳 작업실에 들어가기도 싫을 정도였어요. 도자기를 만들려면 물레를 (지금은 전기로 물레를 돌리지만) 그때는 직접 발로 차면서 물레를 돌려서 만들어야 했어요.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없는 열악한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 자리에서 제가 쓰러지고 말았어요. 이것도 공부라고 해야 하고, 수업이라고 들어야 하느냐는 회의감도 생기고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그때 제가 몸무게가 47kg일 정도로 병약하기도 했고, 체력적으로도 도대체 안 되는 걸 교수님이 수업의 과정이니까 하라고, 꼭 해야 한다고 강조하니까 무리를 했던 거였지요. 이건 예술 작업이 아니라 완전히 중노동이구나 생각되더군요. 나는 체력도 안 되고 창의력도 부족하고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뭘 해야 하나 하고 방황을 많이 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공예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있었나 봐요. 그러다가 교수님께서 디자인을 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셨어요. 막연하기만 했었지요. 디자인이라... 내가 뭘 디자인한단 말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 당시 최고의 핫 플레이스라고 할 수 있었던 동네가 명동이었어요. 첨단의 거리 명동에 가서 그 거리를 헤매듯 걸어 다니면서 어떤 형태를 하나 그려서 제출해야 하는데, 아이디어는 없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참신한 이미지 같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흐느적흐느적 인파 속을 헤집듯 며칠을 걸어 다니곤 했어요.
명동성당에 가려면 언덕이 좀 높았어요.
을지로 입구 쪽에서 명동성당에 올라가려면 오른쪽으로는 명동성당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판잣집들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그 길에 헌책방들이 몇 개 있었어요. 거기에 외국 잡지를 모아서 판매하는 코너가 있었어요. 그 헌 책들을 뒤적이다 보니까 눈에 확 띄는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들이 있더군요. 근사한 도자기 형태의 사진도 있고, 섬유공예도 있고, 금속 공예도 있었고, 그래서 그 헌 책을 한 권 샀어요. 집에 와서 숙제하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어느 한 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내 시선이 거기에 멈추면서 몇 시간이고 그 페이지만 쳐다보고 있게 되더라고요. 이게 뭘까? 너무 멋지다! 이게 뭔지 모르겠는데 바라볼수록 신기하고 멋있어서 내 책상 위 벽에다 붙여놓고 그 사진만 바라보고 앉아있게 되는 거예요. 그 형태가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에 와닿았던가 봐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작품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속공예가의 작품이었던 거예요. 그때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라서 작가의 이름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는데 다만 그 작품의 형태가 너무 멋있었고 마음에 딱 들어앉아서 나도 저런 거 하고 싶다. 나도 저런 작품을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정했지요. 지금 보니 그 작품이라는 것이 반짝반짝하는 금속으로 만든 국그릇 같은 생활용품이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듯하지만 오묘한 무엇인가가 있는 형태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금속 공예를 공부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내가 4년 동안 무슨 공부를 했나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한 게 없고 맨날 놀러만 다니고 명동거리에 나가서 친구들과 쏘다니다가 오비스캐빈이라든가 쎄시봉, 또는 은성 술집이나 다방(그때는 명동에 다방이 많았어요)에 놀러 다니면서 멋 부리고 폼 잡을 줄만 알았지 공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는 여자들은 결혼하면 솥뚜껑 운전사가 되는 거라고 우리 친구끼리 모여 앉으면 우리는 솥뚜껑 운전사가 될 거라고 자조적인 이야기를 허무하게 나누고 그랬어요. 취업하기도 어려웠지만, 어찌어찌 운이 좋아 취업해서 잘 나간다고 해봐야 큰 기업체 사장의 비서 자리 정도였어요. 서울대 미술대학 나오고 아무리 잘났어도 전공을 살려서 취직하기는 어려웠어요. 1969년 우리나라가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거든요. 그저 남자 잘 만나 결혼해서 솥뚜껑 운전사가 되는 게 목적이었어요. 나도 아는 사람이 중매로 선을 봤는데 고등고시에 붙은 사람이라고 해서 데이트도 하고 몇 번 만나기도 해봤는데 어색하기만 하고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 해도 결혼까지 성사되기는 쉽지 않더군요. 그 이후에도 몇 번 선을 더 봤는데 첫눈에 반해서 확 끌리지 않아서 그런지 마음이 통하지 않더라고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나도 주체적으로 내 인생을 계획해 봐야겠다는 생각하면서 알마 아이커만과 헬렌 셔크 의 작품을 봤고 그 작품에 강하게 마음이 끌렸었던 걸 생각하며 미국에 유학하러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유학 시험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영어, 일반사회, 국사 3과목을 공부하고 나서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졌지만, 대리석 건물이었던 중앙청 그 안에 들어가서 유학시험을 봤어요. 당시에 유학하러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중앙청 안에서 시험을 치렀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들기도 해요. 시험이 통과되면 여권이 나오고, 비자가 나와야 하는데, 집에 마침 녹음기도 있었고 타자기도 있어서 녹음기로 발음 연습도 하고 타자기로 지원서를 작성해서 미국에 있는 여덟 군데의 대학에 입학지원서를 보냈어요.
여덟 군데의 대학은 어떻게 알아냈냐면 지금 교보빌딩 그 자리에 미국문화원이 있었어요. 미국문화원 도서실에 가서 미국 대학교 리스트와 전공이 나와 있는 사전같이 두껍고 큰 책에서 찾아보았어요. 거기에 소개되어 있는 학교 중에서 내게 딱 알맞겠다 또는 가능성이 있겠다 싶은 대학교 여덟 군데를 뽑아서 입학지원서를 보냈는데 그중에 한군데서 연락이 왔어요. 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에 있는 Cranbrook Academy Of Art라고 하는 예술전문대학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디트로이트라는 도시가 우리나라의 울산시처럼 자동차산업이 발달한 도시여서 잘사는 사람이 꽤 많았고, 그 도시의 갑부들이 만든 학교였어요. 저는 지원서는 냈지만 이름도 잘 몰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학교는 작지만, 예술대학에서는 최고로 알아주는 학교였던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그 학교 출신들이 이미 제법 많이 있었더군요. 여덟 군데 중에 유일하게 합격했으니 감사한 마음이었는데 외국인 학생 한 명에게 주는 장학금까지 제가 받게 되었다고 해요. 이 학교를 거쳐 간 우리나라의 졸업생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서 한국 사람들을 우위에 두고 인정하는 분위기에 제가 덕을 본 셈이지요. 유학생이 되고 또 장학금을 받고 가게 되었으니 꿈에 부풀어서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겠어요. 그런데 예술로 특화된 단과대학이어서 그런지 학교 건물도 납작하게 낮은 건물이었고 초라하고 규모도 작아서 대학 캠퍼스라는 생각이 안 들더군요. 금속공예 실이라는 곳에서 첫 수업이 이루어졌는데, 오래된 옛날 건물이어서 마치 대장간에 들어가는 것 같더군요. 쇳덩이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고, 들어가자마자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천장 높이까지 올라가고 있었는데 깜짝 놀랐어요. 7kg나 8kg은 될 것 같은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는 덩치가 큰 사람들이 노동하는 현장의 분위기 같았어요.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가마에다가 쇳덩이를 집어넣었다가 꺼내서 큰 망치로 두들기며 작업이라는 걸 하고 있었어요. 내가 서울에 살 때 우리 동네 대장간에서 윗옷을 훌러덩 벗어부친 남자들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일하던 바로 그 모습과 같았어요. 교수님이 무쇠 덩어리와 무거운 망치를 주면서 이걸 두드려서 생각하고 있는 디자인의 형태를 만들어 보라는 거예요. 그게 첫 수업이었던 거예요.
막연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내가 하고자 하던 공부는 이게 아닌데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는 아름답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그런 작품을 디자인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그랬어요. 미국 유학을 하기 위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토플시험을 보고 비싼 값을 지불하여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만 하며 실망하고, 이런 건 하기가 싫다 아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건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섬유공예과나 다른 과를 알아보고 전과를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군요. 금속공예과라서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장학금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다른 과로 전공을 바꿀 수는 없었어요.

거기다가 개인적인 사정은 서울에 있는 우리 집이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셔서 제법 잘살던 집이었는데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사업에 실패해서 부도가 났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우리가 살던 집에 집달관이 와서 빨간 딱지를 붙이고 가족들은 쫓겨나서 작은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고 편지가 온 거예요. 유학자금을 보내줄 수가 없으니, 네가 알아서 생활하고 공부하라고 그러니 절망적인 상황이 된 거였지요. 도망을 가려 해도 운전할 줄도 모르고 자전거 탈 줄도 모르는 나를 보고 미국 학생들이 어떻게 운전할 줄도 모르고 자전거 탈 줄도 모르는 애가 다 있냐고 그러면서 막 놀리기도 하고 그래요. 빠져나갈 수 없는 사면초가 상태에서 눈물을 머금고 생각해 낸 게 내가 장학금도 받았고 전공을 선택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다시 해보자 다짐을 굳게 했어요.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들게 작업을 하다가 옆에서 몸집도 크고 힘이 좋은 애들이 망치로 쇳덩이를 막 두들기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걸 바라보면서 힘이 센 그 학생들을 부러워하다가 50kg도 안 나가는 내가 하기에는 벅차기도 했지만, 그 당시 히피 시대가 막 태동할 때라서 교수들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가 너무 반항적이었어요. 교수들은 바른 자세로 서서 강의하는데 학생들은 소파나 의자에 누워서 강의를 듣거나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그런 태도나 모습이 보수적인 동양에서 온 나로선 용납하기 어려웠었지요. 그해에 미국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켄트 주립대 학생들의 시위 현장에 정부군이 총을 쏴서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생기면서 학생들이 모여 앉아서 저희끼리 수군거리기도 하고, 동양 학생인 내가 지나가면 힐끗힐끗 쳐다보는 눈길이 날카롭고 위협적이고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인디아나 주립대학교에서 유명한 여자 교수님이 오셔서 특강하는데 그 강의 내용이 맘에 들어서 강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교수님을 찾아가서 교수님의 학교로 가고 싶다고 그랬더니 이렇게 좋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우리 학교로 오고 싶어 하느냐고 아무나 못 들어가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왜 그러냐고 신기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흐뭇해하시는 거 같더군요. 동양에서 crandrook academy of art에 입학할 정도면 실력이 상당한 학생이라고 인정하셨던가 봐요. 그래서 그 학교로 옮길 수 있게 되었어요. 주립대학이어서 건물이나 캠퍼스도 크고 넓어서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았어요.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생들이 와있었고 기숙사도 있어서 한국 사람도 만날 수 있고 하니까 너무 행복하더군요. 그 학교에 다니면서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고 작품활동도 활발하게 할 수가 있었어요. 아이도 생기고 남편은 국내대학에 교수가 되어 귀국하게 되어 가족과 함께 귀국했어요. 내 나라 내 땅에 와서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가족들의 도움으로 육아에서 벗어나게 되니 작품 준비를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하던 작업 재료와 도구들을 모두 다 싸서 와서 악착같이 준비해서 6개월 후에 개인전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전시장이 많지 않았어요. 신세계 백화점 화랑과 미도파 백화점에 전시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미도파 백화점이 없어졌지만, 대관을 거기에서 할 수밖에 없어서 미도파 백화점 화랑에서 했는데 많은 호평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금속 공예가 전시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사람들이 처음 보는 전시회라고 하면서 많이 찾아와서 성황리에 전시를 마칠 수가 있었어요.
금속 공예가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니까 주위에 있는 고마운 분의 주선으로 국민대학교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어요. 그때 국민대학교가 개교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학생들도 많지 않았고, 전체 교수님 숫자가 60여 명 정도였던 시절이에요. 작품이 좋아서 작품만 하고 싶었는데 교수를 하게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거였지요. 곧이어 전임을 맡게 되니 부담스럽기도 했고, 집이 목동에 있어서 정릉까지 출퇴근해야 했는데 거리도 멀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한강 다리 부근에서 차가 밀리기 시작해요. 그러면 앞으로도 갈 수가 없었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교수라는 사람이 자꾸 지각을 하게 되니 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어요. 작품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연구도 해야 하는데 피곤하고 무거운 몸과 마음으로 어느 날 만원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평창동이라는 동네에 빈터가 많이 보였어요. 그래서 무조건 차에서 내려 복덕방을 찾아가서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집터를 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쉽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을 구해주셨어요.

마침, 아버지가 토건업을 하시던 분이라서 집을 쉽게 지을 수가 있었어요. 사업은 망했지만, 집 짓는 노하우가 있었으니까요. 집안에다가 내 작업실도 맘에 쏙 들게 만들어 주셨고, 마당을 넓게 해주셔서 마당에서 큰 작품도 창작할 수도 있고 우리 가족들이 살기에 좋은 집을 잘 지어주셨어요. 제가 작업을 하려면 금속공예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평창동에서 종로3가까지 와야 했어요.
종로3가에 오면 주변에 재료상이 아주 많았고 가까운 곳에는 공방도 많았어요. 인사동에서부터 이 거리가 전부 금은방, 금속공예 재료, 철물점 등등 거의 가 다 재료상이었고 공방이다시피 했었어요. 지금 이 앞 순라길은 물론이고 주변 국악로가 전부 공방 거리였어요. 재료를 막 아무렇게나 막 흩트려놓기도 하고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크게 나서 시끄럽기도 하고 지저분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무질서했어요.
평창동에서 여기를 하루에도 두 번씩 와야 할 때도 있었고, 작업하랴 종로3가에 나가서 재료를 사 오랴 바쁘게 살다가 교수직을 은퇴할 때쯤 이제 금속 공예가로서 작업을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좀 더 편하게 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에 알아보다가 여기 이 집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주변에 아주 오래된 조그만 한옥이 모여있는 동네인데 땅이 (대지가) 작은 편이라서 두 채를 사서 한 채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마침 두 채가 붙어있는 땅을 가진 매물이 나와서 이 집을 구하게 되었어요. 한집은 대문이 종묘 담벼락 쪽으로 나 있고, 한집은 작은 골목길 쪽으로 난 이 집을 가족들이 다 마음에 든다고 하고, 흡족해해서 대지 70평에다가 이 집을 지었어요. 작업실은 반 지하에 있고 1층은 갤러리 겸 카페로 운영하고, 3층에는 살림집이 있으니까, 동선이 매우 효율적이어서 편하고 좋았어요. 땅을 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그 당시 평창동에 있는 집보다 여기가 집값이나 땅값이 더 쌌어요. 옛날 건물이기는 하지만 저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었어요. 여기가 그래도 서울 시내 한복판이고 아름다운 궁궐이 바로 앞에 있고, 또 교통도 좋아서 지하철 노선이 3개나 지나가고 그런데도 집값이 평창동 골짜기보다 더 쌌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가 있었어요.
문화재가 많이 있어서 개발을 함부로 못 하는 동네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즐비한 한옥이 많이 낡아 있었고, 골목길이 좁아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 동네가 정감이 있고, 참 좋았어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길이 종묘 담장을 끼고 둘러서서 나 있는 서순라길이라고 생각해요. 역사적인 흔적이 남아있고 그 옛이야기를 상상하면서 걸어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복잡한 머리가 치유되는 것 같은 상쾌함이 있어요. 특히 은은한 불빛 아래 담장을 바라보려면 저녁에 와서 걸어보곤 해요. 조형미가 아름다워서 창작 작업할 때 아이디어나 영감을 얻기도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지금 하는 이 작업이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공예가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끝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수긍했다.
더운 계절의 어느 하루 하얀 뭉게구름과 비췻빛 하늘 아래 종묘 돌담길 옆 그 길을 거닐다가 팔뚝에 와닿은 바람결에서 내가 느꼈던 그 자유로운 냄새처럼 김승희 작가님도 특유의 남다른 예술가의 감성을 종묘 담벼락 아래 그 길에서 충만하게 만끽하시면서 행복하게 살고 계신 것이다.
질문할 새도 없이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그 열정으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창작열을 종묘 돌담길 옆 그 길에서 활활 태우셔서 후손들에게도 길이길이 빛날 훌륭한 예술 작품 많이 창작하시기를 기원해 본다.
날짜 : 2024년 7월 3일
대상 : 김승희 공예가
장소 : 갤러리카페 소연
주제 : 종로의 이웃
기록 : 조영남
여름 날씨라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선물처럼 이렇게 좋은 날씨를 만나기도 한다. 오늘이 그렇다.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는 하늘 색깔은 아름다운 비췻빛 그 자체다. 이런 날은 종묘 담벼락 앞 그 길을 걸어보아야 한다. 뜨거우면서도 차분한 여름 공기를 느끼면서 그 길을 걷다 보면, 짧은 소매 옷을 입은 맨살 팔뚝에 직접 와닿는 바람에서는 마냥 자유로운 냄새가 배어 나오곤 한다.
종묘 담벼락 앞 그 길은 서순라길이라고 한다.
종로3가에서 권농동까지 이어져 있는 도로명이다.
조선시대 종묘를 순찰하던 순라군이 다니던 길의 서쪽에 있기에 서순라길이라는 길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서순라길에서 골목길을 살짝 벗어나서 종묘의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오밀조밀하게 꾸며놓은 카페나 주얼리 샵 여러 개가 모여있다.
익숙해서 마음에 와닿았던 갤러리카페 소연에 들어가 보았다.
금속공예 작가이며 국민대학교 금속공예과 명예 교수님으로 재직하시며, 집을 직접 설계하고 지어서 갤러리와 카페 소연을 운영하고 계시는 김승희 작가를 만나보았다.
‘소연’은 작은 자연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한다.
제가 대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는 금속공예과라는 전공과목이 아예 개설되어 있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그때 철이 없었고, 정보도 없어서 그냥 막연하게 미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소망하나를 가지고 미술대학에 입학했어요. 65학번인데 그 해에 갑자기 서울대학교에 혜성처럼 응용미술학과라는 전공이 새로 생겼어요. 그때 생각에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기보다 응용미술을 전공하면 내가 내 맘대로 응용해서 재미있는 작품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그게 제 성격과 맞을 것도 같아서 응용미술과를 지원했어요. 동숭동에 캠퍼스가 있었는데, 법과대학 맞은편에 낡고, 형편없는 창고 같은 건물이 미술대학이라고 했어요.
서울대학교라고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도 있을 줄 알았는데 창고처럼 지저분하고 초라하고 형편없는 캠퍼스에 실망스럽기도 했어요. 그때는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의 건물이 몇 채 없었어요. 미술대학에서의 수업 내용이 서예도 배우고, 사진도 배우고, 데생 수업도 하고 뭐 그런 기초적인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도록 개설해 놓았더라고요. 아마 1학년이니까 그런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을 하게 했었던 것 같아요. 2학년이 되면서 전공을 공업디자인과 상업디자인과 중에 선택해야 하는데, 상업디자인은 규격이 딱딱 맞게 자로 재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그러는 건 내 성격과 안 맞을 거 같아서 좀 더 틀에 짜여 있지 않고 자유로운 공업디자인을 전공하겠다고 했어요. 일 년 동안 공업디자인을 공부해 봤는데 별로 흥미가 없어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명동이나 종로 시내로 놀러 다니기만 하고 그랬어요. 3학년에 올라가서 디자인과와 공예과로 전공이 또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때 생각에 공예과가 좀 자유롭고 허술해 보여서 공예과를 전공으로 선택했어요.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어요.
박 대통령이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의지가 강하셔서 서울대 미대 디자인과에 대해 매우 관심이 높았어요.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디자인산업이 중요하다고 특별하게 도자기를 구워낼 수 있는 가마를 학교 캠퍼스 안에다 만들어 주셨어요. 벽돌을 쌓아서 가마를 만들었는데 전기가 아니고 장작을 때야 하는 가마였던 거 같아요. 공예과는 흙을 만져서 그릇을 만드는 거였는데 공예과 실기실(스튜디오)은 함석으로 지붕을 얹어서 지었는데 건물이 허술해서 그런지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거기에서 작업은커녕 그곳 작업실에 들어가기도 싫을 정도였어요. 도자기를 만들려면 물레를 (지금은 전기로 물레를 돌리지만) 그때는 직접 발로 차면서 물레를 돌려서 만들어야 했어요.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없는 열악한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 자리에서 제가 쓰러지고 말았어요. 이것도 공부라고 해야 하고, 수업이라고 들어야 하느냐는 회의감도 생기고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그때 제가 몸무게가 47kg일 정도로 병약하기도 했고, 체력적으로도 도대체 안 되는 걸 교수님이 수업의 과정이니까 하라고, 꼭 해야 한다고 강조하니까 무리를 했던 거였지요. 이건 예술 작업이 아니라 완전히 중노동이구나 생각되더군요. 나는 체력도 안 되고 창의력도 부족하고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뭘 해야 하나 하고 방황을 많이 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공예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있었나 봐요. 그러다가 교수님께서 디자인을 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셨어요. 막연하기만 했었지요. 디자인이라... 내가 뭘 디자인한단 말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 당시 최고의 핫 플레이스라고 할 수 있었던 동네가 명동이었어요. 첨단의 거리 명동에 가서 그 거리를 헤매듯 걸어 다니면서 어떤 형태를 하나 그려서 제출해야 하는데, 아이디어는 없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참신한 이미지 같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흐느적흐느적 인파 속을 헤집듯 며칠을 걸어 다니곤 했어요.
명동성당에 가려면 언덕이 좀 높았어요.
을지로 입구 쪽에서 명동성당에 올라가려면 오른쪽으로는 명동성당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판잣집들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그 길에 헌책방들이 몇 개 있었어요. 거기에 외국 잡지를 모아서 판매하는 코너가 있었어요. 그 헌 책들을 뒤적이다 보니까 눈에 확 띄는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들이 있더군요. 근사한 도자기 형태의 사진도 있고, 섬유공예도 있고, 금속 공예도 있었고, 그래서 그 헌 책을 한 권 샀어요. 집에 와서 숙제하기 위해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어느 한 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보는 순간 내 시선이 거기에 멈추면서 몇 시간이고 그 페이지만 쳐다보고 있게 되더라고요. 이게 뭘까? 너무 멋지다! 이게 뭔지 모르겠는데 바라볼수록 신기하고 멋있어서 내 책상 위 벽에다 붙여놓고 그 사진만 바라보고 앉아있게 되는 거예요. 그 형태가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에 와닿았던가 봐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작품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금속공예가의 작품이었던 거예요. 그때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라서 작가의 이름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는데 다만 그 작품의 형태가 너무 멋있었고 마음에 딱 들어앉아서 나도 저런 거 하고 싶다. 나도 저런 작품을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정했지요. 지금 보니 그 작품이라는 것이 반짝반짝하는 금속으로 만든 국그릇 같은 생활용품이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듯하지만 오묘한 무엇인가가 있는 형태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금속 공예를 공부해서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내가 4년 동안 무슨 공부를 했나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한 게 없고 맨날 놀러만 다니고 명동거리에 나가서 친구들과 쏘다니다가 오비스캐빈이라든가 쎄시봉, 또는 은성 술집이나 다방(그때는 명동에 다방이 많았어요)에 놀러 다니면서 멋 부리고 폼 잡을 줄만 알았지 공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때는 여자들은 결혼하면 솥뚜껑 운전사가 되는 거라고 우리 친구끼리 모여 앉으면 우리는 솥뚜껑 운전사가 될 거라고 자조적인 이야기를 허무하게 나누고 그랬어요. 취업하기도 어려웠지만, 어찌어찌 운이 좋아 취업해서 잘 나간다고 해봐야 큰 기업체 사장의 비서 자리 정도였어요. 서울대 미술대학 나오고 아무리 잘났어도 전공을 살려서 취직하기는 어려웠어요. 1969년 우리나라가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거든요. 그저 남자 잘 만나 결혼해서 솥뚜껑 운전사가 되는 게 목적이었어요. 나도 아는 사람이 중매로 선을 봤는데 고등고시에 붙은 사람이라고 해서 데이트도 하고 몇 번 만나기도 해봤는데 어색하기만 하고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 해도 결혼까지 성사되기는 쉽지 않더군요. 그 이후에도 몇 번 선을 더 봤는데 첫눈에 반해서 확 끌리지 않아서 그런지 마음이 통하지 않더라고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나도 주체적으로 내 인생을 계획해 봐야겠다는 생각하면서 알마 아이커만과 헬렌 셔크 의 작품을 봤고 그 작품에 강하게 마음이 끌렸었던 걸 생각하며 미국에 유학하러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유학 시험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영어, 일반사회, 국사 3과목을 공부하고 나서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졌지만, 대리석 건물이었던 중앙청 그 안에 들어가서 유학시험을 봤어요. 당시에 유학하러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중앙청 안에서 시험을 치렀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라는 들기도 해요. 시험이 통과되면 여권이 나오고, 비자가 나와야 하는데, 집에 마침 녹음기도 있었고 타자기도 있어서 녹음기로 발음 연습도 하고 타자기로 지원서를 작성해서 미국에 있는 여덟 군데의 대학에 입학지원서를 보냈어요.
여덟 군데의 대학은 어떻게 알아냈냐면 지금 교보빌딩 그 자리에 미국문화원이 있었어요. 미국문화원 도서실에 가서 미국 대학교 리스트와 전공이 나와 있는 사전같이 두껍고 큰 책에서 찾아보았어요. 거기에 소개되어 있는 학교 중에서 내게 딱 알맞겠다 또는 가능성이 있겠다 싶은 대학교 여덟 군데를 뽑아서 입학지원서를 보냈는데 그중에 한군데서 연락이 왔어요. 미국 미시간주의 디트로이트에 있는 Cranbrook Academy Of Art라고 하는 예술전문대학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디트로이트라는 도시가 우리나라의 울산시처럼 자동차산업이 발달한 도시여서 잘사는 사람이 꽤 많았고, 그 도시의 갑부들이 만든 학교였어요. 저는 지원서는 냈지만 이름도 잘 몰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학교는 작지만, 예술대학에서는 최고로 알아주는 학교였던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그 학교 출신들이 이미 제법 많이 있었더군요. 여덟 군데 중에 유일하게 합격했으니 감사한 마음이었는데 외국인 학생 한 명에게 주는 장학금까지 제가 받게 되었다고 해요. 이 학교를 거쳐 간 우리나라의 졸업생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서 한국 사람들을 우위에 두고 인정하는 분위기에 제가 덕을 본 셈이지요. 유학생이 되고 또 장학금을 받고 가게 되었으니 꿈에 부풀어서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겠어요. 그런데 예술로 특화된 단과대학이어서 그런지 학교 건물도 납작하게 낮은 건물이었고 초라하고 규모도 작아서 대학 캠퍼스라는 생각이 안 들더군요. 금속공예 실이라는 곳에서 첫 수업이 이루어졌는데, 오래된 옛날 건물이어서 마치 대장간에 들어가는 것 같더군요. 쇳덩이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고, 들어가자마자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천장 높이까지 올라가고 있었는데 깜짝 놀랐어요. 7kg나 8kg은 될 것 같은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는 덩치가 큰 사람들이 노동하는 현장의 분위기 같았어요.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가마에다가 쇳덩이를 집어넣었다가 꺼내서 큰 망치로 두들기며 작업이라는 걸 하고 있었어요. 내가 서울에 살 때 우리 동네 대장간에서 윗옷을 훌러덩 벗어부친 남자들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일하던 바로 그 모습과 같았어요. 교수님이 무쇠 덩어리와 무거운 망치를 주면서 이걸 두드려서 생각하고 있는 디자인의 형태를 만들어 보라는 거예요. 그게 첫 수업이었던 거예요.
막연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내가 하고자 하던 공부는 이게 아닌데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는 아름답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그런 작품을 디자인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그랬어요. 미국 유학을 하기 위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토플시험을 보고 비싼 값을 지불하여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만 하며 실망하고, 이런 건 하기가 싫다 아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건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섬유공예과나 다른 과를 알아보고 전과를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군요. 금속공예과라서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장학금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다른 과로 전공을 바꿀 수는 없었어요.
거기다가 개인적인 사정은 서울에 있는 우리 집이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셔서 제법 잘살던 집이었는데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사업에 실패해서 부도가 났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우리가 살던 집에 집달관이 와서 빨간 딱지를 붙이고 가족들은 쫓겨나서 작은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고 편지가 온 거예요. 유학자금을 보내줄 수가 없으니, 네가 알아서 생활하고 공부하라고 그러니 절망적인 상황이 된 거였지요. 도망을 가려 해도 운전할 줄도 모르고 자전거 탈 줄도 모르는 나를 보고 미국 학생들이 어떻게 운전할 줄도 모르고 자전거 탈 줄도 모르는 애가 다 있냐고 그러면서 막 놀리기도 하고 그래요. 빠져나갈 수 없는 사면초가 상태에서 눈물을 머금고 생각해 낸 게 내가 장학금도 받았고 전공을 선택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다시 해보자 다짐을 굳게 했어요.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들게 작업을 하다가 옆에서 몸집도 크고 힘이 좋은 애들이 망치로 쇳덩이를 막 두들기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걸 바라보면서 힘이 센 그 학생들을 부러워하다가 50kg도 안 나가는 내가 하기에는 벅차기도 했지만, 그 당시 히피 시대가 막 태동할 때라서 교수들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가 너무 반항적이었어요. 교수들은 바른 자세로 서서 강의하는데 학생들은 소파나 의자에 누워서 강의를 듣거나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그런 태도나 모습이 보수적인 동양에서 온 나로선 용납하기 어려웠었지요. 그해에 미국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켄트 주립대 학생들의 시위 현장에 정부군이 총을 쏴서 학생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생기면서 학생들이 모여 앉아서 저희끼리 수군거리기도 하고, 동양 학생인 내가 지나가면 힐끗힐끗 쳐다보는 눈길이 날카롭고 위협적이고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인디아나 주립대학교에서 유명한 여자 교수님이 오셔서 특강하는데 그 강의 내용이 맘에 들어서 강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교수님을 찾아가서 교수님의 학교로 가고 싶다고 그랬더니 이렇게 좋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우리 학교로 오고 싶어 하느냐고 아무나 못 들어가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왜 그러냐고 신기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흐뭇해하시는 거 같더군요. 동양에서 crandrook academy of art에 입학할 정도면 실력이 상당한 학생이라고 인정하셨던가 봐요. 그래서 그 학교로 옮길 수 있게 되었어요. 주립대학이어서 건물이나 캠퍼스도 크고 넓어서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았어요.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생들이 와있었고 기숙사도 있어서 한국 사람도 만날 수 있고 하니까 너무 행복하더군요. 그 학교에 다니면서 남편을 만나 결혼도 했고 작품활동도 활발하게 할 수가 있었어요. 아이도 생기고 남편은 국내대학에 교수가 되어 귀국하게 되어 가족과 함께 귀국했어요. 내 나라 내 땅에 와서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가족들의 도움으로 육아에서 벗어나게 되니 작품 준비를 열심히 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하던 작업 재료와 도구들을 모두 다 싸서 와서 악착같이 준비해서 6개월 후에 개인전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전시장이 많지 않았어요. 신세계 백화점 화랑과 미도파 백화점에 전시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미도파 백화점이 없어졌지만, 대관을 거기에서 할 수밖에 없어서 미도파 백화점 화랑에서 했는데 많은 호평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금속 공예가 전시회가 별로 없었거든요. 사람들이 처음 보는 전시회라고 하면서 많이 찾아와서 성황리에 전시를 마칠 수가 있었어요.
금속 공예가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니까 주위에 있는 고마운 분의 주선으로 국민대학교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어요. 그때 국민대학교가 개교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학생들도 많지 않았고, 전체 교수님 숫자가 60여 명 정도였던 시절이에요. 작품이 좋아서 작품만 하고 싶었는데 교수를 하게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거였지요. 곧이어 전임을 맡게 되니 부담스럽기도 했고, 집이 목동에 있어서 정릉까지 출퇴근해야 했는데 거리도 멀었지만,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한강 다리 부근에서 차가 밀리기 시작해요. 그러면 앞으로도 갈 수가 없었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교수라는 사람이 자꾸 지각을 하게 되니 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어요. 작품에 집중할 시간도 부족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연구도 해야 하는데 피곤하고 무거운 몸과 마음으로 어느 날 만원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평창동이라는 동네에 빈터가 많이 보였어요. 그래서 무조건 차에서 내려 복덕방을 찾아가서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집터를 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쉽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을 구해주셨어요.
마침, 아버지가 토건업을 하시던 분이라서 집을 쉽게 지을 수가 있었어요. 사업은 망했지만, 집 짓는 노하우가 있었으니까요. 집안에다가 내 작업실도 맘에 쏙 들게 만들어 주셨고, 마당을 넓게 해주셔서 마당에서 큰 작품도 창작할 수도 있고 우리 가족들이 살기에 좋은 집을 잘 지어주셨어요. 제가 작업을 하려면 금속공예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평창동에서 종로3가까지 와야 했어요.
종로3가에 오면 주변에 재료상이 아주 많았고 가까운 곳에는 공방도 많았어요. 인사동에서부터 이 거리가 전부 금은방, 금속공예 재료, 철물점 등등 거의 가 다 재료상이었고 공방이다시피 했었어요. 지금 이 앞 순라길은 물론이고 주변 국악로가 전부 공방 거리였어요. 재료를 막 아무렇게나 막 흩트려놓기도 하고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크게 나서 시끄럽기도 하고 지저분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무질서했어요.
평창동에서 여기를 하루에도 두 번씩 와야 할 때도 있었고, 작업하랴 종로3가에 나가서 재료를 사 오랴 바쁘게 살다가 교수직을 은퇴할 때쯤 이제 금속 공예가로서 작업을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좀 더 편하게 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에 알아보다가 여기 이 집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주변에 아주 오래된 조그만 한옥이 모여있는 동네인데 땅이 (대지가) 작은 편이라서 두 채를 사서 한 채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마침 두 채가 붙어있는 땅을 가진 매물이 나와서 이 집을 구하게 되었어요. 한집은 대문이 종묘 담벼락 쪽으로 나 있고, 한집은 작은 골목길 쪽으로 난 이 집을 가족들이 다 마음에 든다고 하고, 흡족해해서 대지 70평에다가 이 집을 지었어요. 작업실은 반 지하에 있고 1층은 갤러리 겸 카페로 운영하고, 3층에는 살림집이 있으니까, 동선이 매우 효율적이어서 편하고 좋았어요. 땅을 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그 당시 평창동에 있는 집보다 여기가 집값이나 땅값이 더 쌌어요. 옛날 건물이기는 하지만 저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었어요. 여기가 그래도 서울 시내 한복판이고 아름다운 궁궐이 바로 앞에 있고, 또 교통도 좋아서 지하철 노선이 3개나 지나가고 그런데도 집값이 평창동 골짜기보다 더 쌌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가 있었어요.
문화재가 많이 있어서 개발을 함부로 못 하는 동네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즐비한 한옥이 많이 낡아 있었고, 골목길이 좁아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 동네가 정감이 있고, 참 좋았어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길이 종묘 담장을 끼고 둘러서서 나 있는 서순라길이라고 생각해요. 역사적인 흔적이 남아있고 그 옛이야기를 상상하면서 걸어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복잡한 머리가 치유되는 것 같은 상쾌함이 있어요. 특히 은은한 불빛 아래 담장을 바라보려면 저녁에 와서 걸어보곤 해요. 조형미가 아름다워서 창작 작업할 때 아이디어나 영감을 얻기도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지금 하는 이 작업이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공예가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끝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수긍했다.
더운 계절의 어느 하루 하얀 뭉게구름과 비췻빛 하늘 아래 종묘 돌담길 옆 그 길을 거닐다가 팔뚝에 와닿은 바람결에서 내가 느꼈던 그 자유로운 냄새처럼 김승희 작가님도 특유의 남다른 예술가의 감성을 종묘 담벼락 아래 그 길에서 충만하게 만끽하시면서 행복하게 살고 계신 것이다.
질문할 새도 없이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그 열정으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창작열을 종묘 돌담길 옆 그 길에서 활활 태우셔서 후손들에게도 길이길이 빛날 훌륭한 예술 작품 많이 창작하시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