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상: 1세대 마을 활동가 천미진 님
○ 날짜: 2025년 10월 28일 (화)
○ 장소: 안국사거리 이곳저곳
○ 기록: 류보람(글), 박현정(사진)
서울에서 마을공동체 사업이 막 태동하던 무렵, 낯선 정책을 지역에서 관계로 풀어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무형의 제도가 지역 곳곳에 뿌리내린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논하며 그 속에서 복작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터.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에서 서서히 증발해 버린 ‘마을’과 ‘지역 공동체’라는 이름의 가치가 전 지구적 과제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요즘. 이미 오래전, 그 속에 담긴 희망을 알아보고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그 처음의 도전을 기억하여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는 일도 의미 있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북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1세대 마을 활동가 천미진 님. 그는 종로구 주민소통센터의 전신인 마을공동체 지원센터가 처음으로 개소할 당시 활동가로 시작해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 컨설턴트로서 창신숭인 도시재생, 한옥마을 조성, 한양도성 주민공동체, 민관협치 사업 등을 함께하며 역대 활동가들의 현장을 함께 지내왔다.
이른 새벽 성당에서, 등교길 학교에서, 산책하며 자매님, 선생님, 어머니라 부르는 일이 익숙한 사이. 그가 지나온 여러 날과 순간들이 궁금했지만, 선뜻 묻지 못하고 망설이던 차, 이번 기록단 활동을 핑계로 용기를 냈다. 감사하게도 서툰 부름에 기꺼이 응답해 준 그.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활동가 선후배로 마주 앉았다.

처음 공동체 활동을 시작하신 건 언제였나요?
종로구에 마을공동체 주민활성화 사업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예요. 지금 고등학생인 아이가 네 살 때니까 2014년 무렵이었죠. 우연히 주민센터에서 사업 공고를 보고 참여하게 됐어요. 기억하기론 송파 세 모녀 사건(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발단으로 시에서 이웃끼리 서로 얼굴도 알고 이야기도 하며 지내라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들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당시 어느 나라의 원주민들은 아이의 부모가 죽으면 그 아이를 마을에서 함께 책임져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명받았던 터라 함께 어린이집에 다니는 학부모들과 마음을 모아 참여하게 되었어요.
학부모 커뮤니티에서는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북촌자올(모든 사람과 두루 어울린다는 순우리말)’이름으로 8년간 활동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모여 나눔 장터를 열고, 지역 탐방으로 가족 여행도 같이 갔어요. 또 아이들과 모여 마을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문화센터에서 공연도 했고, 그게 인연이 되어 북촌 축제와 국회의장 취임식에 초대받기도 했어요. 동주민센터에서 앙코르 공연도 했고요.

8년 동안이나 지속하셨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이세요.
혼자서는 절대 못 했을 일입니다. 함께하는 부모님들이 계셨어요. 아이를 키우는 마음은 다 같으니까, 자연스럽게 힘이 모였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시간을 함께 나누다 보니 서먹서먹 인사하는 사이에서 안부를 묻는 관계로 나중엔 걱정하고 챙겨주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인연이 되었어요.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에도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 참여 했던 게 계기가 되어 종로구에서 먼저 활동가를 시작했고, 나중에 정식 교육을 거쳐 서울시 공동체 사업의 컨설턴트 활동으로 이어졌어요. 마을 안에서 공동체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과 행정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이었죠. 한창때는 17개 동을 직접 맡아 관리했어요. 또 당시 서울시에서 활동가 양성을 위해 ‘마을 대학’을 만들었는데 1기로 입학해서 공부도 쉼 없이 했습니다. 회의하고, 사람들 만나고, 교육 다니고…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마을 대학’은 어떤 곳이었나요?
서울시에서 마을 활동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려고 만든 곳이에요. 단순히 시민 교육이 아니라,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을 전문가로 키우는 실무 중심의 직무교육 프로그램이었죠. 참 감사하게도 그곳에서 민관 협치 관련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현장은 어떤 분위기였나요?
정말 따듯했어요. 처음이라 체계도 뚜렷하지 않았고, 방향도 분명하지 않았지만, 다들 진심이었거든요. 마을대학에서 만났던 분들과도 즐겁게 활동했습니다. 배우는 것도, 사람 만나는 것도 즐거웠어요. 돌이켜보면 정말 이 일에 완전히 빠져 살았던 것 같아요. 피곤하다는 생각보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구나’하는 확신이 더 컸어요. 그 시절의 사람들과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보람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무엇보다 제가 민관 협치 사업의 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하던 시절, 주민 공론장을 통해 북촌에 놀이터가 있었으면 하는 지역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오랜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었을 때...참 뿌듯했던 것 같아요. 오래 방치되어 있던 원서공원이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시민들의 쉼터로 다시 태어난 사건이었어요.
두 번째로는 서울시 생활문화예술 사업의 일환으로 반년 이상 애쓰면서 종로구 생활문화예술 동아리를 직접 발굴하고 제1회 종로 생활문화예술 축제를 진행한 일도 보람으로 남아요. 그 축제는 여전히 <종로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알고 있어 매년 축제 때만 되면 그때 생각도 나고요.
또 창신, 숭인 지역의 도시재생 마을 공동체가 우수 사례로 서울시장상을 받고 함께 활동하던 저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상을 받은 일, 북촌자올 등 이웃들과 소통하며 더불어 사는 이야기를 기록해서 ‘서울시 마을 이야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일 말하려니 날을 새도 부족할 것 같아요.(웃음)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종로구와 서울시 담당자들, 노인종합복지회관 사람들, 학부모 모임, 동네 어르신들, 이웃들, 함께 공부하고 활동하던 동료들과 서로 배우고 기대면서 성장했던 시간들이요. 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활동을 해오신 만큼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일의 보람과는 별개로, 활동가의 역할이 뚜렷하게 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행정 직원도 아니고, 주민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다 보니 불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늘 유연하게 움직여야 했던 것 같아요. 실제적인 권한 보다 책임이 더 무거운 상황도 쉽지 않았던 것 같고요. 정산, 보고, 회계 같은 업무를 대부분 맡아야 했고, 또 현장과 가장 가까운 자리다 보니 개개인의 애로사항도 같이 들어주고 고민하고 해결하려 했고요. 그러던 중 정권이 바뀌면서 센터가 문을 닫게 되었고, 초창기의 분위기 역시 많이 사라졌어요. 오래 활동하면서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겨서, 결국 제가 좋아하는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는 유치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꿈꾸시나요?
몇 해 전 아동 청소년 사회복지사 자격증에 이어 올해는 보육교사 공부를 마치고 이제 자격증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아이들을 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나중에는 지역에 아이, 청소년, 어른들 모든 세대가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어울림 센터를 만들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지금 이 길을 걷는 후배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동체 활동은 참 좋은 일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일. 이것만큼 아름답고 귀하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요? 누구라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안에 어떤 에너지가 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해요. 열정만으로는 오래가기 어렵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서로를 존중하며 신뢰를 지켜야 해요. 제가 경험해 보니 공동체 활동은 결국 ‘사람이 남는 일’ 같아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북촌에서 마을 활동을 처음 시작하던 때, 가장 먼저 만난 활동가. 그 후로도 나는언제나 올곧고 성실하게, 지역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틈을 메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그 장면 하나하나가 내게는 배움이었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였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누군가 지나간 자리 위에서 또 다른 마음이 열리고, 그 마음이 다시 미래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순간들. 앞서 걸어간 그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그렇게 이어진 길 위를 또 다른 누군가의 걸음이 다시 이어가리라.
긴 발자취 끝에 그가 오래도록 지켜온 희망이 그대로 내게도 닿기를, 그리고 언젠가 나를 통해 당신들에게도 전해지기를 조심스레 바라며...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 대상: 1세대 마을 활동가 천미진 님
○ 날짜: 2025년 10월 28일 (화)
○ 장소: 안국사거리 이곳저곳
○ 기록: 류보람(글), 박현정(사진)
서울에서 마을공동체 사업이 막 태동하던 무렵, 낯선 정책을 지역에서 관계로 풀어내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무형의 제도가 지역 곳곳에 뿌리내린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를 논하며 그 속에서 복작이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터.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에서 서서히 증발해 버린 ‘마을’과 ‘지역 공동체’라는 이름의 가치가 전 지구적 과제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요즘. 이미 오래전, 그 속에 담긴 희망을 알아보고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그 처음의 도전을 기억하여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는 일도 의미 있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북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1세대 마을 활동가 천미진 님. 그는 종로구 주민소통센터의 전신인 마을공동체 지원센터가 처음으로 개소할 당시 활동가로 시작해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 컨설턴트로서 창신숭인 도시재생, 한옥마을 조성, 한양도성 주민공동체, 민관협치 사업 등을 함께하며 역대 활동가들의 현장을 함께 지내왔다.
이른 새벽 성당에서, 등교길 학교에서, 산책하며 자매님, 선생님, 어머니라 부르는 일이 익숙한 사이. 그가 지나온 여러 날과 순간들이 궁금했지만, 선뜻 묻지 못하고 망설이던 차, 이번 기록단 활동을 핑계로 용기를 냈다. 감사하게도 서툰 부름에 기꺼이 응답해 준 그.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활동가 선후배로 마주 앉았다.
처음 공동체 활동을 시작하신 건 언제였나요?
종로구에 마을공동체 주민활성화 사업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예요. 지금 고등학생인 아이가 네 살 때니까 2014년 무렵이었죠. 우연히 주민센터에서 사업 공고를 보고 참여하게 됐어요. 기억하기론 송파 세 모녀 사건(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발단으로 시에서 이웃끼리 서로 얼굴도 알고 이야기도 하며 지내라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들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당시 어느 나라의 원주민들은 아이의 부모가 죽으면 그 아이를 마을에서 함께 책임져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명받았던 터라 함께 어린이집에 다니는 학부모들과 마음을 모아 참여하게 되었어요.
학부모 커뮤니티에서는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북촌자올(모든 사람과 두루 어울린다는 순우리말)’이름으로 8년간 활동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모여 나눔 장터를 열고, 지역 탐방으로 가족 여행도 같이 갔어요. 또 아이들과 모여 마을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문화센터에서 공연도 했고, 그게 인연이 되어 북촌 축제와 국회의장 취임식에 초대받기도 했어요. 동주민센터에서 앙코르 공연도 했고요.

8년 동안이나 지속하셨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이세요.
혼자서는 절대 못 했을 일입니다. 함께하는 부모님들이 계셨어요. 아이를 키우는 마음은 다 같으니까, 자연스럽게 힘이 모였던 것 같아요. 이런저런 시간을 함께 나누다 보니 서먹서먹 인사하는 사이에서 안부를 묻는 관계로 나중엔 걱정하고 챙겨주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인연이 되었어요.
서울시 마을공동체 사업에도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에 참여 했던 게 계기가 되어 종로구에서 먼저 활동가를 시작했고, 나중에 정식 교육을 거쳐 서울시 공동체 사업의 컨설턴트 활동으로 이어졌어요. 마을 안에서 공동체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과 행정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이었죠. 한창때는 17개 동을 직접 맡아 관리했어요. 또 당시 서울시에서 활동가 양성을 위해 ‘마을 대학’을 만들었는데 1기로 입학해서 공부도 쉼 없이 했습니다. 회의하고, 사람들 만나고, 교육 다니고…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마을 대학’은 어떤 곳이었나요?
서울시에서 마을 활동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려고 만든 곳이에요. 단순히 시민 교육이 아니라,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을 전문가로 키우는 실무 중심의 직무교육 프로그램이었죠. 참 감사하게도 그곳에서 민관 협치 관련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현장은 어떤 분위기였나요?
정말 따듯했어요. 처음이라 체계도 뚜렷하지 않았고, 방향도 분명하지 않았지만, 다들 진심이었거든요. 마을대학에서 만났던 분들과도 즐겁게 활동했습니다. 배우는 것도, 사람 만나는 것도 즐거웠어요. 돌이켜보면 정말 이 일에 완전히 빠져 살았던 것 같아요. 피곤하다는 생각보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구나’하는 확신이 더 컸어요. 그 시절의 사람들과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보람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무엇보다 제가 민관 협치 사업의 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하던 시절, 주민 공론장을 통해 북촌에 놀이터가 있었으면 하는 지역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오랜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었을 때...참 뿌듯했던 것 같아요. 오래 방치되어 있던 원서공원이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시민들의 쉼터로 다시 태어난 사건이었어요.
두 번째로는 서울시 생활문화예술 사업의 일환으로 반년 이상 애쓰면서 종로구 생활문화예술 동아리를 직접 발굴하고 제1회 종로 생활문화예술 축제를 진행한 일도 보람으로 남아요. 그 축제는 여전히 <종로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알고 있어 매년 축제 때만 되면 그때 생각도 나고요.
또 창신, 숭인 지역의 도시재생 마을 공동체가 우수 사례로 서울시장상을 받고 함께 활동하던 저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상을 받은 일, 북촌자올 등 이웃들과 소통하며 더불어 사는 이야기를 기록해서 ‘서울시 마을 이야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일 말하려니 날을 새도 부족할 것 같아요.(웃음)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종로구와 서울시 담당자들, 노인종합복지회관 사람들, 학부모 모임, 동네 어르신들, 이웃들, 함께 공부하고 활동하던 동료들과 서로 배우고 기대면서 성장했던 시간들이요. 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활동을 해오신 만큼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일의 보람과는 별개로, 활동가의 역할이 뚜렷하게 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행정 직원도 아니고, 주민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다 보니 불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늘 유연하게 움직여야 했던 것 같아요. 실제적인 권한 보다 책임이 더 무거운 상황도 쉽지 않았던 것 같고요. 정산, 보고, 회계 같은 업무를 대부분 맡아야 했고, 또 현장과 가장 가까운 자리다 보니 개개인의 애로사항도 같이 들어주고 고민하고 해결하려 했고요. 그러던 중 정권이 바뀌면서 센터가 문을 닫게 되었고, 초창기의 분위기 역시 많이 사라졌어요. 오래 활동하면서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겨서, 결국 제가 좋아하는 아이들을 매일 만날 수 있는 유치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꿈꾸시나요?
몇 해 전 아동 청소년 사회복지사 자격증에 이어 올해는 보육교사 공부를 마치고 이제 자격증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아이들을 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나중에는 지역에 아이, 청소년, 어른들 모든 세대가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어울림 센터를 만들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지금 이 길을 걷는 후배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공동체 활동은 참 좋은 일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일. 이것만큼 아름답고 귀하고 소중한 일이 있을까요? 누구라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안에 어떤 에너지가 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해요. 열정만으로는 오래가기 어렵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서로를 존중하며 신뢰를 지켜야 해요. 제가 경험해 보니 공동체 활동은 결국 ‘사람이 남는 일’ 같아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북촌에서 마을 활동을 처음 시작하던 때, 가장 먼저 만난 활동가. 그 후로도 나는언제나 올곧고 성실하게, 지역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틈을 메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그 장면 하나하나가 내게는 배움이었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였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누군가 지나간 자리 위에서 또 다른 마음이 열리고, 그 마음이 다시 미래의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순간들. 앞서 걸어간 그들의 존재가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그렇게 이어진 길 위를 또 다른 누군가의 걸음이 다시 이어가리라.
긴 발자취 끝에 그가 오래도록 지켜온 희망이 그대로 내게도 닿기를, 그리고 언젠가 나를 통해 당신들에게도 전해지기를 조심스레 바라며...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