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신산하고 고생스럽기만 한 서울살이 (기록 : 조영남)

2025-04-16
조회수 138


날짜 : 2024년 10월19일

대상 : 무악동 주민 최문순

장소 : 무악동 현대아파트 자택

주제 : 종로의 어르신 (노인)

기록가 : 조영남


 

무악동 현대아파트에 가기 위해서는 독립문역 3번 출구로 나와 행촌동 골목길로 들어서야 한다. 큰 교회가 있는 초입에는 언제나 종이류나 골판지 박스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브러진 상태로 있기가 십상이었다.

그랬던 주변이 어떨 때 보면, 말끔하게 정돈이 되어있기도 했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아름다운 사람의 부지런하고 촘촘한 손길이 있어,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를 해 놓았을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궁금하던 차에 어느 날 꽤 높이 쌓여있는 종이나 박스류 더미 속에 엎드려서 열심히 네모 박스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떼어낸 다음 납작하게 펼쳐서 밟고 정리하고 계란판도 펼쳐서 반듯하게 만들어 나일론끈으로 묶고 계시는 분을 만나게 됐다.

반갑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해서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드는 모습이 조금은 힘들어 보였다.

아마도 한참 만에 허리를 펴시는 것 같았다.

허리도 펴실 겸 좀 쉬었다 하시라고 청해보았다.

날마다 오후 4시까지는 그날 모은 폐지를 고물상에 가져다주어야 만 그날 하루의 일정이 마무리된다고 하시며 바쁜 손놀림을 멈추지 않으신다.

어렵게 청하는 인터뷰 요청에 그래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해주셨다.


 사시는 곳이 어디세요?


 바로 여기 무악동 현대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지가 3년 남짓 됐어요.

 이 근방 무악동이나 행촌동 주변에서 40년이 넘게 남의 집 방 한 칸에 사글세를 살면서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 만했어요.

그러면서 우리 딸이 여러 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위해 임대아파트를 신청했지만, 당첨이 안 되었어요. 임대아파트에 당첨이 되려면 조건이 아주 아주 까다로워요. 소득이 적어야 하고 자식들도 없는 독거노인이거나 그래야 하는데 저는 자식이 딸과 아들 둘이나 있으니까, 당첨이 안 되는 거였어요.


 대신고등학교 나온 아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노는 걸 좋아했어요. 학원에 보내주면 공부를 하겠구나 하는 기대를 하고 없는 돈을 마련해서 학원을 보내봤어요. 처음에는 영어 한 과목만 배워보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수학도 배워보겠다고 그래요. ‘이 녀석이 이제 공부 맛을 알아가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려나 보다’ 싶어서 남의 돈을 빌려다 수학도 배우라고 학원비를 대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녀석이 학원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를 했더라고요. 누나, 누나 하면서 부르던 여학생 선배를 사귀며 데이트 비용이 필요하니까 두 과목을 듣겠다고 학원비를 더 달라고 했던 거지요. 그렇게 마련해준 돈으로 다니라는 학원은 안 다니고 연애를 했던 거지요.


그렇게 공부하기 싫어하던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찌어찌해서 어렵사리 백화점에 취직하게 되어서 좋아했는데, 거기서 일을 잘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물건을 덤핑해서 팔면 돈을 쉽게 더 많이 벌 수 있다고 직원들 몇 명이 백화점을 그만두고 동업을 해본다고 하더니, 그 일도 잘 안되어서 그만두고 이것도 해보겠다고 하다가 저런 사업도 해보면 좋겠다고 했는데 하는 일마다 사업을 망해 먹고 그러더니 지금은 인천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일 년에 몇 번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bae7814e6b201.png최문순님 ⓒ주민기록단 조영남



일은 어디서 언제부터 하셨어요?


그때 제가 ‘서울 도가니탕’ 집이라는 음식점에서 하루에 열두 시간 넘게 일을 했어요. 지금은 그 집이 없어졌지만 24시간 영업을 하는 식당이었거든요. 우리 시어머니께서 취직을 시켜줬어요. 구세군 교회를 다니시던 어머님께서는 그래도 아는 사람이 이 동네에 많으시니까 그 사람들이 식당을 소개해 주셔서 거기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16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을 했어요. 그 집 사장님이나 사모님과는 마치 가족과 같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제가 젊을 때니까요.

처음에는 홀에서 주문을 받고 음식 나르는 일을 시켰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주방일을 배워서 주방일을 하다가 낮보다 밤에 주방일을 하면 월급을 더 많이 받을 수가 있다고 해서 밤에 주방일을 많이 했어요.

그것도 12시간 이상 초과근무를 하면서 일을 했어요.

그 당시에는 두 아이의 학비를 마련하려면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했어요. 지금은 학비가 없어도 학교에 다닐 수가 있지만, 학비와 점심값, 그리고 학원비를 마련해야 했으니까 혼자 벌어서 감당하기에는 벅찼어요.

나도 촌에서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우리 자식들은 내 뼈가 부서지도록 일해서라도 공부를 시키고 싶었거든요.


 서울의 종로구로 이사 오신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와서 독립문 초등학교로 전학했어요. 우리 딸은 배화여중에 입학하려고 했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사도 안 했으면서 서울에 있는 좋은 학교로 보내려고 위장 전입하려는 거 아니냐고 교육청에서 우리를 의심하면서 바로 중학교에 입학을 안 시켜줬어요. 그래서 딸은 대전 아는 집에다 맡겨두고 한 달을 기다렸어요. 그래서 우리 딸은 중학교 일 학년 한 달 동안 공부를 못했어요. 그러던 딸이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해서 종각에 있었던 박준 미용학원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웠어요. 학교 다닐 때 보니까 우리 딸이 처음 중학교 입학할 때부터 공부를 따라가기 힘들어하더니 공부하는 걸 어려워하더군요. 그래서 기술을 배우면 좋겠다고 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부터 미용학원을 다녔는데 학원비 마련하려면 제가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했어요. 미용 기계도 사야 하고 파마약도 사서 실습하려면 또 돈이 더 많이 들고 나중에는 화장품도 다 사서 실습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 딸이 국가 자격증 시험을 한 번에 합격했어요.


그때부터 강남에 있는 미용실에서 시다 (일하는 사람 옆에서 그 일을 거들어주는 사람) 로 취직했어요. 자격증만 있지 현장에서 머리 만지는 기술이 없으니까, 시다를 시켰대요. 배우는 애한테 미용실에서 일을 얼마나 많이 시켰는지 저녁 늦게 집에 오면 독한 파마약 때문인지 손톱이 부풀어서 아프고 하루 종일 서서 하는 일이다 보니 다리가 퉁퉁 부어서 집에 오면, 딸의 퉁퉁 부은 두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딸을 부둥켜 안고 막 울고 그랬어요.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딸을 붙잡고 지금까지 미용 기술 배우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고 학원비도 많이 들었는데 조금만 더 참고 해보자고 설득하고 달래기도 했어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영국 유학을 하면 대우를 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유명한 ‘비달 사순’이라는 곳으로 공부를 더 하러 가고 싶다고 울면서 매달리더군요. 내가 더 많이 열심히 일하면 우리 딸이 좋은 기술을 배워와서 평생 대우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기대를 했어요.

제가 일하는 식당에서도 우리 사정을 잘 알고 또 16년이 넘도록 오랫동안 성실하게 근무하고 그러니까 사장님께서 고맙게도 월급을 앞당겨서 돈을 대줬어요. 내가 일했던 ‘서울 도가니탕’ 집이 오래되고 규모가 아주 컸어요. 지금은 대성 집이라는 데가 장사가 아주 잘 되고 거기서 밥을 먹으려면 줄을 길게 서야 하고 그렇잖아요. 그때는 그 두 군데 식당이 인기가 많았었어요. ‘서울 도가니탕’ 사장님이 돌아가시고 장사를 접게 되었지요.

그렇게 어렵게 공부하고 온 우리 딸이 한때는 잘나가는 헤어디자이너가 되어서 잡지 책에도 소개되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일해서 월급을 100만 원 받으면 우리 딸은 300만 원 받고 그랬어요.


계속 그렇게 잘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는 실력 있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고 헤어 디자인에 대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라는 게 머리에서 안 나오고 그러니까 점점 밀리기 시작했나 봐요. 사위라도 든든한 직업이 있거나 사돈집이라도 잘 살았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아서 개인미용실을 차렸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저라도 돈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미용실을 하나 떡하니 차려줘야 했는데 그걸 못 해줬어요. 고생만 하다가 나중에는 몸도 안 좋아지고 하니까 지금은 미용 일을 안 하고 쉬고 있어요. 아마 파마약이나 염색약이 독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딸도 집 없이 어렵게 살고 있고, 아들도 벌이가 시원치 않고

그렇게 자식들도 먹고 살기가 마땅찮으니까, 제가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da8af6e9bd0d9.png무악동 전경 ⓒ주민기록단 조영남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아침 9시부터 3시까지는 아파트에서 청소일을 해요. 아파트 3개 동을 맡아서 청소일을 하고 그 일이 끝나면 종이나 박스도 모으고 빈 병도 모아서 고물상에 가져다 팔면 3,000원 정도 더 벌 수 있어요. 오늘은 3,500원 받았네요. 아파트에서 나오는 종이 박스나 재활용품들은 계약한 수거 업체가 있기에 한 개도 가져올 수는 없어요. 아파트에서 청소일을 하는 것도 그동안 오랫동안 꾸준히 해왔었기 때문에 이 나이에도 할 수가 있는 거지 만약에 아파서 이제 청소일을 못 하거나 그만두게 되면 다시 청소하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이제는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에 취직할 수가 없는 거지요. 지금도 다리가 이렇게 아파서 병원에서는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무릎 관절 수술을 하게 되면 몇 달 동안 일도 못 하고, 입원도 해야 하고 또 재활치료도 해야 한다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일을 안 하게 되면 아파트 청소하는 일을 그만둬야 해요. 그러면 저는 일자리를 완전히 잃게 되잖아요.

다시 또 일하고 싶어도 이 나이에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데는 없어요.


 고향은 어디인가요?


 저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거기가 박경리 작가의 ‘토지’라는 소설 속의 무대가 되어서 아주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제가 거기 살 때는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가야 하는 지리산의 깊은 산골짜기였어요. 빨치산을 잡아간다고 지서에서는 팬티만 입은 사람을 묶어서 잡아가는 것도 제가 직접 봤어요.

경찰이 우리 집안까지 들어와서 집안 살림을 다 뒤지고 하면서 빨치산인지 간첩인지를 잡는다고 소동을 벌이고 그랬어요, 그럴 때마다 어린 나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저는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는데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저한테는 무시무시할 만큼 일을 많이 시켰어요. 부엌살림은 물론 보리타작도 하고, 벼농사도 했고 소, 돼지 키우는 일도 했어요. 몸도 약하고 키도 작은 체구인데도 제가 일을 못 하는 게 없을 정도로 잘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 부모님은 자꾸 일을 더 많이 시키고 집에서는 삼시 세끼 식구들 밥도 다해야 하고, 거기다가 동생들까지 돌보는 일까지 했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아주 징글징글해요.

제가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까 결혼해야 하는데 그때는 농사철이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맞선을 보라고 중매쟁이가 집으로 왔어요. 중매쟁이가 소개하는 사람들은 전부가 다 그 근방에서 농사짓는 사람만 선을 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결심을 한 게 농사짓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시집을 안 갈 거라고 다짐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나이가 많아지고 그랬는데 친척 중의 한 분이 대전에 있는 사람과 선을 보라고 해서 선을 봤는데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여기 하동 지리산 산골짜기만 벗어나면 될 거 같아서 그 사람과 한두 번 만나고 바로 결혼했어요. 대전에서 전파상을 한다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중매쟁이가 신랑감을 소개하는 말 중에서 반은 거짓말이었어요. 알고 보니까 대전 삼성동이라는 동네에서 전파상 종업원으로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이더군요.

거기다가 돈도 없는 가난한 집안이었어요. 그래도 젊으니까, 도시에서 돈을 벌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고 수리하는 기술도 배워서 나중에는 남편이 그 동네에다 전파상을 차렸어요. 다리미라든가 라디오, 물 끓이는 전기 포트 같은 소형 전기제품을 팔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는 전파상이었어요.

남편이 고쳐주면 제가 따라다니면서 도와주고, 다 고치고 수리한 전기다리미나 선풍기를 상자에 담아 주거나 보자기에 싸주면 그 집까지 배달도 해주면서 함께 일을 했어요. 흑백 텔레비전도 화면이 비가 오는 것처럼 세로로 죽죽 줄이 쳐지면서 흐리게 나오거나, 퍼뜩 퍼뜩거리고 그러면 안테나가 고장이 나서 그런 거라고 그 집 지붕 위로 올라가서 안테나를 흔들어서 매달거나 꽉 묶어서 고정해 주면, 텔레비전이 잘 나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돈을 좀 벌기도 했는데 가까운 거리에 삼성이나 금성 또는 대우전자 대리점이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 대리점에서는 물건도 팔았지만, 에이에스도 해준다고 하면서 고장 난 제품을 고쳐주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냉장고나 선풍기 또는 텔레비전 등의 가전제품이 잘 만들어져 그랬겠지요. 어쨌든 고장이 잘 안 나서 고치러 오거나 수리해달라고 오는 손님도 점점 줄어들었고, 돈을 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던 일을 모두 접고 낯설고 물설다고 하는 서울로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를 와서 독립문 초등학교로 전학했어요.




fc2c922b9910d.png무악동 전경 ⓒ주민기록단 조영남



그때부터 서울살이하면서 이 동네에서만 뱅글뱅글 돌아다니며 사글세로 셋방을 살았어요. 지금은 인왕산 아이파크아파트가 세워진 동네가 비탈진 달동네였는데 그 달동네에서도 꼭대기에만 주로 살았어요. 사글세가 싼 동네를 찾아서 집을 구하다 보니까 주로 그런 동네에만 찾아다니면서 이사를 열세 번도 더 했어요. 사글세로 사는 집이 허물어질 듯이 낡아서 흙벽에서 지네가 나와 우리 딸이 지네에게 물리기도 하고 그랬어요. 수돗물도 안 나와서 물을 길어다 쓰고 그렇게 고생하면서 서울살이했어요. 그래도 여기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살았어요. 뭐 특별히 좋아서 못 떠난 것도 아니고 처음에 보따리를 여기다 풀었으니까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던 거지요.



지금 사는 아파트는 비록 임대아파트이고 열 평밖에 안되지만, 방 하나 있고 주방과 거실이 있고 화장실도 있어서 혼자 살기에는 아주 편안하고 좋아요.

아파트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사글세 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어요.

매월 임대료를 15만 원 정도 내야 하고 관리비도 내고 전기요금 수도 요금 내야 하니까 내가 몸이 아파도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아파트 청소일이 오후 3시에 끝나면, 4시에는 폐지 수거 업체가 마감하니까 그 이전에 부지런히 정리해서 갖다줘야 해요. 그리고 주변에 있는 거 모아서 정리해서 묶어놨다가 내일 또 4시까지 폐지업체에 갖다줘야지요. 폐지를 많이 모으면 하루에 4, 5천 원 정도를 받게 되는데 그래도 현금을 바로 주니까 돈 받을 때의 기분이 뿌듯하고 좋아요. 아파트 청소하고 매달 월급을 130만 원 받아요. 그동안은 4대 보험료를 떼었는데 이제 나이가 많으니까, 의료보험료만 내고 있어요. 아파트에서 청소일을 하지만 아파트에 소속된 노동자가 아니고 용역업체에 청소하는 일로 취직을 한 거예요. 면접도 거기에서 봤고 월급도 용역업체에서 주고 그래요.

3시에 아파트 청소를 끝내고 퇴근하고 와서 부지런히 오후 4시까지 폐지 수거 업체에 모아 놓은 폐지를 갖다주고 나면 몸이 너무 피곤해요. 얼른 집에 와서 쉬고 싶어요.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바로 누워있거나 꼼짝도 안 하고 있어요.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도 밖에 나가고 싶지가 않을 정도로 꼼짝하기가 싫어져요. 이렇게 힘들어하니까 우리 딸이 용돈을 줄 테니까 이제는 그만 일하라고 하는데 그 딸도 자식들이 둘이나 있고 그 애들 공부시키려면 돈도 많이 들어갈 거고 어려울 텐데 제가 어렵게 사는 딸한테 용돈을 받으면서 몸을 편하게 놀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사위가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고요.

내가 몸도 아프고 늙었지만 이렇게 일을 하면서 그래도 잘 견디는 거 같아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농사는 일이 하기 싫어서 고향을 떠나왔지만 늙어서까지 이렇게 힘든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어요?


담담하게 살아오신 이야기를 하시는 걸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다만 아프지 말고, 건강하시기만 빌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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