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광복 후에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학교를 세웠다고 어른들께서 얘기해 주셨어요. 전국에 있는 향교의 유림으로부터 기부금을 갹출 받아서 성균관대학교가 되었고 초대 성균관대학교 학장으로 심산 선생이 추대받아서 성균관장까지도 겸임하셨다고 합니다. 성균관대 정문 옆에는 정조가 세운 탕평 비각이 있었고, 지금은 위치가 조금 바뀌었지만, 예전에 그 주변이 광장처럼 좀 넓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고 여름이 되면 돗자리 펴고 앉아 수박이나 참외도 깎아서 나눠 먹고 아이들은 운동장처럼 거기서 뛰어놀고 그랬어요. 그때는 성균관대 정문도 없었어요. 뒷산 계곡에서 내려온 물길이 있어서 이불 빨래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멱 감고 놀기도 했어요. 개천을 건너는 제법 높은 다리가 있었고, 저는 친구들과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쭉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했지요.
그물이 어디서부터 흘러왔냐 하면 동 반수는 보성학교 뒤쪽 성북동 쪽에서 흘러왔고, 서 반수는 성균관대 왼쪽에서 내려왔어요. 동 반수는 수량이 적어서 쫄쫄거리며 실개천처럼 흘러 내려왔지만 서 반수는 물이 제법 많이 흘렀어요. 그러니까 거기서 빨래도 하고 그랬지요. 그 두 물줄기가 합쳐져 남쪽으로 흘러가서 대학천이 되었어요.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진 않아도 땅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지요. 동성고등학교가 있는 그쯤에 ‘광예교’라는 다리가 있었어요. 넓을(廣) 예절(禮) 자인데 동네 사람들은 그 다리를 ‘광옝이다리’ ‘광옝이다리’ 라고 불렀어요. 그 개천이 더 흘러가서 문리대 앞에는 학생들이 미라보다리라고 하는 다리가 있었어요. 그 밑에 흐르는 개천을 세느강이라고 부르면서 문리대 친구들은 괜히 폼들을 잡고 그랬지요. 호기부리기를 좋아하는 친구 녀석들은 다리난간에서 뛰어내리는 녀석들도 있었어요. 높이가 2m도 채 안 되는데 멋 부리느라고 그 밑으로 뛰어내려봤자 다치는 놈도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별로 없었어요.
- 선생님 학교는 어느 학교에 다니셨어요?
- 처음에는 혜화초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다가 학생들이 너무 많이 밀려 들어오니까 창경궁 초등학교로 쫓겨나듯 밀려났어요. 명륜동은 잘 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이 모여 사는 참 재미있는 동네였어요. 특히 명륜1가는 좀 더 잘사는 동네였어요. 장면 박사의 집도 있었고, 효성그룹의 저택도 있고 소설가 한무숙 선생도 이 동네에서 살았고, 소위 씨알이 굵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예요. 명륜2가는 그런대로 서울 종로에서 뿌리박고 사람들이나 중산층이 많이 살았는데, 안쪽으로 올라가면 산동네여서 거의 무허가 집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상가가 지어져서 번화한 거리가 되었는데 예전에는 먼저 집을 짓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그런 무허가 집이 많았어요. 명륜3가는 성균관대학교 둘레를 빙 돌아가는 동네, 아까 말한 서반수가 흐르던 동네 창경궁 돌담이 있는 동네였어요. 창경궁 돌담이 지금처럼 높지 않고 그 동네는 지대가 넓지 않으니까 거기는 무허가 집이 별로 없었어요. 성대 뒤쪽으로는 무허가 집이 많이 지어지고 거의 90%가 무허가 집이었어요. 경상도 전라도에서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어려우니까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렇게 서울에 올라온 수많은 사람이 다 어디에서 살았겠어요. 서울에 집들은 이미 한정적이었는데,
지금의 세운상가도 원래는 방화벽 역할을 하는 공 땅이었어요. 비어 있는 땅이었다는 얘기지요. 종묘 앞에서부터 퇴계로까지 세운상가잖아요. 그 터에는 집이나 건물을 못 짓게 허가를 내주지도 않았어요. 나중에는 삼풍상가, 대림상가, 진영 상가, 풍전 상가가 지어져서 세운상가가 되었지만, 원래 그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일제 강점기에 거기를 비워둔 이유가 방화림 역할을 했던 거예요. 목조 건물이니까 불이 붙으면, 더이상 다른 건물로 불길이 옮겨붙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화이어밸트 였던 거지요.
돈을 벌어서 잘살기 위해 서울에 온 사람들이 돈을 벌려면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 번화한 곳에서 일당을 받고 하루하루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해야 하는데 집이 없어서 그런 위치에 살 수가 없으니까 거기 빈 땅에 무허가로 움막 같은 것을 짓고 들어가 살다가 나중에 돈이 좀 모이면 움막보다 좀 더 나은 허름하지만, 집 모양을 갖추고 사는 사람들이 아주 바글바글했어요.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이 가까우니까 소문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치 도떼기시장 같았어요. 그렇게 방화벽 역할을 못 하고 있어도 그런 불법을 막아낼 우리나라의 행정력은 거기까지 미치지를 못할 정도로 허술한 거였지요.
잠시 학교를 얘기하다가 다른 얘기가 길어졌는데 그럴 정도로 시골에서 올라와서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아이들이 혜화초등학교로 밀고 들어오니까 한 반에 학생이 100명이 넘어가고 한 분단에 20명이 될 정도로 많아지고 교실도 좁고 그러다 보니까 명륜4가에 집이 있는 나 같은 학생들은 다 창경초등학교로 강제 전학을 시켰어요.
창경초등학교가 어디 있었냐면 지금의 치의학과 대학 건물이 있는 장소에 정영사라는 요즘 말로 하면 기숙사가 있었어요. 시골에서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숙소도 제공하는 혜택을 주는 그런 장소였지요. 거기 정영사 출신들이 지금도 정계에 있어요. 지금 국무총리가 그 혜택을 받았지요. 그 정영사 터에 창경궁 초등학교가 있어서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 학교에 가려면 아주 멀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멀다고 할 수 없겠지만 어린 나이에 가까운 혜화초등학교 다니다가 강제 전학으로 쫓겨나서 거기까지 가야 하니까 너무 멀다고 생각된 거였겠지요. 서울 의과대학을 빙 돌아서 걸어가야 했으니까, 지금의 서울대병원 암 병동이 있는 쪽으로 가서 본관이 있는 교내로 질러서 갈 수 있는 쉬운 길이 있었는데 거기 노란 건물의 수위실에 앉아 있는 수위 아저씨한테 들키면 따귀를 맞았어요. 따귀를 때린 그 마귀처럼 무섭게 생긴 수위 아저씨 얼굴은 아직도 잊히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예전에는 왜 그렇게 교사들이나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렸는지 몰라 따귀를 세게 맞고 얼굴이 빨개져서 다시 돌아 나와 먼 길을 돌아서 창경초등학교까지 걸어가다 보면 지각을 해서도 서럽고, 뺨을 맞아서도 억울하고, 남자가 울면 안 되니까 참고 그냥 씩씩거리며 걸어갔어요. 나중에는 창경초등학교가 인수봉이 바라다보이는 쌍문2동으로 옮겨갔는데 학교명은 그대로 창경초등학교를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날짜 : 2024년 11월 8일
대상 : 남윤면
장소 : 종로3가 카페 파스쿠찌
주제 : 종로의 노인
대한민국 서울, 그중에서도 종로의 역사는 무한정으로 깊다. 파도 파도 끊임없이 나오는 역사의 기록물들은 대한민국의 보물단지이며 정체성이기도 하다.
어느 역사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서울(종로)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현재까지도 서울(종로)에서 사는 서울 토박이의 비율은 전체 국민의 4.7 %에 불과하다고 했던가?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나신 분들은 조선 시대를 사셨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선 시대의 시대상을 알았고 또 이해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와의 연결고리인 셈이다. 그분들이 사라지면 조선 시대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분들을 만나면 의미 있는 서울의 이야기 또는 종로의 이야기를 채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서울에 또는 종로에 살고 계신 여러 어르신분을 만나 인터뷰를 해봤지만,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현재도 서울에 살고 계시는 서울 토박이분을 아직도 만나 뵙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던 차였다. 전체 국민의 4.7%에 불과하다는 그 귀한 서울 토박이인 분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큰 걸음으로 달려가 보았다.
-종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으며 종로에 있는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까지 종로에서 다녔다고 하셔서 제가 찾아왔습니다.
태어나신 장소가 어느 동네인가요?
-종로구 명륜동 2가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명륜동이라고 통칭 사용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그 동네를 명륜1가, 2가 3가 4가라고 불렀어요.
성균관대 그 주변은 물론 혜화동 일부도 명륜3가라고 했어요. 성균관대 정문 부근에 우리 집이 있었어요. 전 그 집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균관대 정문으로 들어오는 좁다란 길이 넓은 도로로 확장되면서 우리 집이 헐리게 되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거기가 도로는 좁았었지만, 주변으로 작은 가게나 상점들이 빼곡하게 있었어요. 그중에 동네에서 유명한 팔진옥이라는 가게가 있었어요. 요즘으로 치면 슈퍼마켓처럼 조금 큰 잡화점이었는데 채소도 팔고 반찬도 팔고 고기나 생선 과일도 팔았어요. 팔진옥의 맞은편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길을 넓힌다고 우리 집이 헐리게 된 거였어요. 옛날 집들은 거의 허름하고 작아서 우리가 살았던 집을 어느 날인가 철거하는 사람들이 와서는 그 자리에서 폭삭 주저앉히면서 무너뜨려 버리더군요.
성균관대학교 정문의 위치이지만, 예전에는 그 자리에 경학원이 있었던 자리예요. 조선 시대에는 성균관이었는데 고종 임금 때부터 경학원이라고 했대요.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 자리를 경학원 자리 또는 경학원이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잠깐이었지만, 명륜 전문학교라고도 했었대요.
1945년 광복 후에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학교를 세웠다고 어른들께서 얘기해 주셨어요. 전국에 있는 향교의 유림으로부터 기부금을 갹출 받아서 성균관대학교가 되었고 초대 성균관대학교 학장으로 심산 선생이 추대받아서 성균관장까지도 겸임하셨다고 합니다. 성균관대 정문 옆에는 정조가 세운 탕평 비각이 있었고, 지금은 위치가 조금 바뀌었지만, 예전에 그 주변이 광장처럼 좀 넓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고 여름이 되면 돗자리 펴고 앉아 수박이나 참외도 깎아서 나눠 먹고 아이들은 운동장처럼 거기서 뛰어놀고 그랬어요. 그때는 성균관대 정문도 없었어요. 뒷산 계곡에서 내려온 물길이 있어서 이불 빨래도 하고 물놀이도 하고, 멱 감고 놀기도 했어요. 개천을 건너는 제법 높은 다리가 있었고, 저는 친구들과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쭉 미끄러져 내려오기도 했지요.
그물이 어디서부터 흘러왔냐 하면 동 반수는 보성학교 뒤쪽 성북동 쪽에서 흘러왔고, 서 반수는 성균관대 왼쪽에서 내려왔어요. 동 반수는 수량이 적어서 쫄쫄거리며 실개천처럼 흘러 내려왔지만 서 반수는 물이 제법 많이 흘렀어요. 그러니까 거기서 빨래도 하고 그랬지요. 그 두 물줄기가 합쳐져 남쪽으로 흘러가서 대학천이 되었어요. 지금은 복개가 되어서 보이진 않아도 땅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지요. 동성고등학교가 있는 그쯤에 ‘광예교’라는 다리가 있었어요. 넓을(廣) 예절(禮) 자인데 동네 사람들은 그 다리를 ‘광옝이다리’ ‘광옝이다리’ 라고 불렀어요. 그 개천이 더 흘러가서 문리대 앞에는 학생들이 미라보다리라고 하는 다리가 있었어요. 그 밑에 흐르는 개천을 세느강이라고 부르면서 문리대 친구들은 괜히 폼들을 잡고 그랬지요. 호기부리기를 좋아하는 친구 녀석들은 다리난간에서 뛰어내리는 녀석들도 있었어요. 높이가 2m도 채 안 되는데 멋 부리느라고 그 밑으로 뛰어내려봤자 다치는 놈도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별로 없었어요.
- 선생님 학교는 어느 학교에 다니셨어요?
- 처음에는 혜화초등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다가 학생들이 너무 많이 밀려 들어오니까 창경궁 초등학교로 쫓겨나듯 밀려났어요. 명륜동은 잘 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이 모여 사는 참 재미있는 동네였어요. 특히 명륜1가는 좀 더 잘사는 동네였어요. 장면 박사의 집도 있었고, 효성그룹의 저택도 있고 소설가 한무숙 선생도 이 동네에서 살았고, 소위 씨알이 굵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예요. 명륜2가는 그런대로 서울 종로에서 뿌리박고 사람들이나 중산층이 많이 살았는데, 안쪽으로 올라가면 산동네여서 거의 무허가 집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상가가 지어져서 번화한 거리가 되었는데 예전에는 먼저 집을 짓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그런 무허가 집이 많았어요. 명륜3가는 성균관대학교 둘레를 빙 돌아가는 동네, 아까 말한 서반수가 흐르던 동네 창경궁 돌담이 있는 동네였어요. 창경궁 돌담이 지금처럼 높지 않고 그 동네는 지대가 넓지 않으니까 거기는 무허가 집이 별로 없었어요. 성대 뒤쪽으로는 무허가 집이 많이 지어지고 거의 90%가 무허가 집이었어요. 경상도 전라도에서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어려우니까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요. 그렇게 서울에 올라온 수많은 사람이 다 어디에서 살았겠어요. 서울에 집들은 이미 한정적이었는데,
지금의 세운상가도 원래는 방화벽 역할을 하는 공 땅이었어요. 비어 있는 땅이었다는 얘기지요. 종묘 앞에서부터 퇴계로까지 세운상가잖아요. 그 터에는 집이나 건물을 못 짓게 허가를 내주지도 않았어요. 나중에는 삼풍상가, 대림상가, 진영 상가, 풍전 상가가 지어져서 세운상가가 되었지만, 원래 그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일제 강점기에 거기를 비워둔 이유가 방화림 역할을 했던 거예요. 목조 건물이니까 불이 붙으면, 더이상 다른 건물로 불길이 옮겨붙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화이어밸트 였던 거지요.
돈을 벌어서 잘살기 위해 서울에 온 사람들이 돈을 벌려면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 번화한 곳에서 일당을 받고 하루하루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해야 하는데 집이 없어서 그런 위치에 살 수가 없으니까 거기 빈 땅에 무허가로 움막 같은 것을 짓고 들어가 살다가 나중에 돈이 좀 모이면 움막보다 좀 더 나은 허름하지만, 집 모양을 갖추고 사는 사람들이 아주 바글바글했어요.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이 가까우니까 소문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치 도떼기시장 같았어요. 그렇게 방화벽 역할을 못 하고 있어도 그런 불법을 막아낼 우리나라의 행정력은 거기까지 미치지를 못할 정도로 허술한 거였지요.
잠시 학교를 얘기하다가 다른 얘기가 길어졌는데 그럴 정도로 시골에서 올라와서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아이들이 혜화초등학교로 밀고 들어오니까 한 반에 학생이 100명이 넘어가고 한 분단에 20명이 될 정도로 많아지고 교실도 좁고 그러다 보니까 명륜4가에 집이 있는 나 같은 학생들은 다 창경초등학교로 강제 전학을 시켰어요.
창경초등학교가 어디 있었냐면 지금의 치의학과 대학 건물이 있는 장소에 정영사라는 요즘 말로 하면 기숙사가 있었어요. 시골에서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숙소도 제공하는 혜택을 주는 그런 장소였지요. 거기 정영사 출신들이 지금도 정계에 있어요. 지금 국무총리가 그 혜택을 받았지요. 그 정영사 터에 창경궁 초등학교가 있어서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 학교에 가려면 아주 멀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멀다고 할 수 없겠지만 어린 나이에 가까운 혜화초등학교 다니다가 강제 전학으로 쫓겨나서 거기까지 가야 하니까 너무 멀다고 생각된 거였겠지요. 서울 의과대학을 빙 돌아서 걸어가야 했으니까, 지금의 서울대병원 암 병동이 있는 쪽으로 가서 본관이 있는 교내로 질러서 갈 수 있는 쉬운 길이 있었는데 거기 노란 건물의 수위실에 앉아 있는 수위 아저씨한테 들키면 따귀를 맞았어요. 따귀를 때린 그 마귀처럼 무섭게 생긴 수위 아저씨 얼굴은 아직도 잊히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예전에는 왜 그렇게 교사들이나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렸는지 몰라 따귀를 세게 맞고 얼굴이 빨개져서 다시 돌아 나와 먼 길을 돌아서 창경초등학교까지 걸어가다 보면 지각을 해서도 서럽고, 뺨을 맞아서도 억울하고, 남자가 울면 안 되니까 참고 그냥 씩씩거리며 걸어갔어요. 나중에는 창경초등학교가 인수봉이 바라다보이는 쌍문2동으로 옮겨갔는데 학교명은 그대로 창경초등학교를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중학교도 집에서 가까운 보성 중학교에 다녔어요. 지금 혜화초등학교 지나서 88 올림픽 기념체육관이 지어졌는데 그 자리에 보성중 고등학교가 있었어요. 고등학교까지 같은 자리에 있어서 보성학교 터가 아주 넓었어요. 지금 서울과학고 터와 성북동 넘어가는 고개까지가 보성학교 터였어요. 그 동네 일대가 우암 송시열 선생 집터였어요. 서울 국제고등학교와 서울과학고가 예전부터 인재를 배출한다는 좋은 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지요. 그때도 좋은 학교, 일류학교에 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어요. 그때도 돈 많은 집에서는 과외도 시키고 아이들은 코피를 흘리면서까지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랬어요.
공립 고등학교는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등등이 좋은 학교였고, 사립학교는 보성고 중앙고 휘문고 양정고 배제고 이렇게 등급이 매겨지고 그랬어요. 아무리 좋은 학교라고 해도 명륜동에 살던 나는 용산이나 딴 동네에 있는 학교는 갈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용산은 너무 멀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동네에 있는 학교라고 아무 생각 없이 보성고등학교를 갔어요. 그 학교 나온 사람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꽤 많아요.
현대家에도 있고 정계에도 있어요. 어려운 시대였고 너무나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점심 도시락을 못 가지고 오는 아이들이 한 분단에 서너 명씩은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돌아가면서 도시락을 두 개씩 가져오라고 하셔서 그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그랬어요. 나눠주고 빈 도시락통을 다시 받아서 집에 가져다주면 어머니께서 도시락에 밥알이 남아있다고 나를 혼내시곤 했어요. 우리 집에서는 증조부께서 밥그릇에 밥 한 톨이라도 남기면 농부들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힘들게 농사지어서 우리가 굶지 않고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거냐고 하시면서 밥 한 톨이라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고 교육하셨기 때문에 도시락을 깨끗하게 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내가 도시락밥을 깨끗하게 먹지 않았다고 어머니께 혼 나는 게 매우 억울했던 기억이 나요. 개인적인 얘기지만 제가 좀 예민한 편이어서 학교에서 생리적인 볼일을 잘 못 봤어요. 소변은 괜찮았지만, 대변은 참다 참다 집에 가서 해결하고 그랬는데 하루는 그걸 참지 못하고 그만 옷에다가 똥을 싸는 바람에 친구들에게 망신을 당했던 적도 있었어요. 하~하
명륜동 우리 집에서는 경상도에서 올라와서 서울대 다니는 두 형제에게 사글세로 방을 내줬었어요. 형은 서울대를 다니고 동생은 서울대는 아니고 아마 동국대에 다녔던 거 같아요. 동생이 형을 보필하면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하면서 살았어요. 동생이 부엌에서 석유곤로로 밥을 하다가 석유가 떨어졌으니까 불을 켠 채로 석유곤로에 석유를 넣다가 불이 붙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서 불을 끈다고 물을 퍼다가 붓고 그래서 크게 다친 사람이나 피해는 별로 없었는데 많이 놀라고 수선스러웠어요.
- 대학교는 어디로 가셨어요? 대학교도 역시 가까이에 있는 대학교에 가셨나요? 서울대학교?
- 대학교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에는 가볼 생각도 못 하고, 서울대학교로 갔어요. 학교가 좋은 대학교라는 이유여서가 아니고 그냥 아무런 고민 없이 서울대학교로 갔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서울공대나 서울 상대가 인기가 좋았어요. 문리과대학은 별로 인기가 없었어요. 그 과를 나오신 분들한테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듣게 될는지 모르지만, 그냥 드러누워서도 갈 수 있는 학교라고 했어요. 쉽게 갈 수 있는 문리과대학이었지만, 내가 그 문리과대학을 안 가고, 또 못 간 이유가 두 가지가 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예민한 내가 동네에서 오다가다 하면서 이용해 본 그 학교의 화장실이 아주 더러웠어요. 어떻게 대학교의 화장실이 그 지경으로 더러울 수가 있는지 상상이 안 갈 정도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문리과대학에 대해서도 이미지가 나빴던 거지요. 또 한 가지는 문리과대학을 나오면 취직하기 어려워서 밥 벌어 먹고살기가 힘들다고들 했지요.
서울대 의대는 그때도 인기가 많아서 공부를 아주 잘해야 갈 수가 있었는데, 공부를 반에서 1, 2등으로 잘했는데도 못 가고, 또 안 가는 학생들이 적잖게 있었어요. 왜 그러냐면 의과대학은 6년을 다녀야 하잖아요. 6년 동안 뒷받침해 줄 만한 경제적인 여건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주로 원서를 읽어야 하는데 원서를 구입하려면 책값이 비싸서 또 돈이 많이 들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시골에서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에 가기 위해 올라온 애들이 실력은 되었는데도 서울대 의대를 못 가고 서울공대로 많이 갔지요. 그 외의 문리대 학과 중에는 영문과는 여자들이 주로 지원을 많이 했었고, 남자들이 영문과에 간다고 하면 좀 좋게 봐주지 않고 그랬어요. 국문과나 심리학과 지리학과 사학과 고고인류학과 불문과 인문 사회과 사회과학과가 있었는데 그런 등등의 문리대학은 서울대학교라고 해도 대충 원서만 넣으면 쉽게 갈 수가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대부분 대학교에 못 가는 사람들도 많았잖아요.
나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지도, 못하지도 뭐 그냥 그랬는데 미래의 취직을 위해서는 공대를 가고 싶었어요. 내 실력으로는 간당간당하게 떨어질 거 같아서 자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식품공학과라는 학과가 서울대에 새로 생겼다는거에요. 농대가 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공학과이고 입학하게되면 1회 졸업생이 되니 전망이 좋겠다 생각했던거죠.
그런데 입학하고 나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식품공학과는 농화학과에서 분과된 학과로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온 농화학과 선배들이 쫙 깔려서 층층시하였던 거였어요. 교수들 T/O를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학과를 신설한 것이었더라구요. 이것은 소위 문리대 미학과가 철학과에서 분과된 것과 같은 예지요. 그래서 실망하게 되고 공부할 의욕이 안 생기더라고요. 그때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재수를 해서라도 내가 가고 싶은 학과로 가서 공부를 다시 했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문리대 쪽은 일 점 몇 대일이었는데 농업 식품공학과는 일 점 팔 대 일이었을 정도로 경쟁력이 아주 높아진 거예요. 다시 치열하게 공부할 자신도 없고 얼렁뚱땅 또는 설렁설렁 전공학과 공부를 성실하게 하지 못하고 대학원을, 경영학을 전공하는 쪽으로 갔어요. 돈은 돈대로 들이고, 시간은 시간대로 들여서 대학원을 졸업해 보니, 전공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까 애매한 거예요. 차라리 농화학과를 놀면서라도 계속 다녔더라면 저 사람은 그 분야의 그 대학을 나왔다는 인정을 받았을 것이고 관련 업계에 취직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경영대학원을 나왔으니까, 정통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 적응하느라고 고생 좀 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대한 선생님만의 특별한 애정이나 의미 또는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으신가요?
-우리 증조부께서 조선시대말 홍문관 통사랑이란 벼슬을 하던 중 합방을 맞이했어요. 막상 벼슬이 끊어지니까 하루아침에 호구지책이 어려웠지요. 그런 가운데 신교육을 받지 못한 조부님께서는 일찍 장가는 가셨지, 가장으로서 책임은 크지, 그때 마침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을 신설하게 되었던거죠. 마침 동숭동 근처에 살고있던 덕분에 조부께서 학교를 지을때 등짐을 지어서 벽돌을 나르셨어요. 서울대학교와는 저는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증조부께서 1·4 후퇴 때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데 날씨도 춥고 가족이 흩어지면 다시 찾을 수도 없을 거 같고, 또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으니까, 할머니의 옥양목 치마를 부욱 찢어서 그 천에다 붓글씨로 우리 조상의 내력을 후손에게 남기기 위한 글씨를 써서 주셨답니다. 나중에라도 가족을 찾고 또 뿌리를 알려면 소중하게 간직하고 오래오래 보관하라는 의미였을 거예요. 내용은 남윤면은 무자생이고 몇월 몇 시에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태어났고, 본적은 서울 종로구 효제동이며 조상은 어떤 벼슬을 하였으며 몇 대조의 자손이라는 걸 붓글씨로 쓰셔서 제 옷속에 꿰매 넣어두셨대요. 6.25 전쟁 때 피난 가면서도 어른들과 서로 떨어지더라도 제가 어느 집 자식인지 근본이 어디인지 밝히고 싶으셨던 거지요. 그 급하고 어려웠던 순간에서도 먹을 갈아 그런 글씨를 쓰셨던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옥양목에 쓴 이 글씨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우리 집안의 가계도이자 소중한 보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 거 같으니까, 다음에 만나 할아버지께서 벽돌을 지어 날라 지으셨다는 서울대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다음 약속이 있다고 하셔서 이야기를 더해달라고 조를 수가 없어 인터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