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평화의 집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 중에 무악동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분이 함께 계셨을까요?
신부님이나 활동가 중에는 그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주민은 없었어요.
지원만 해줬어요. 대항하는 방법이라든가 법적인 조항이나 그런 것에 대해 자문해 주는 그 정도였지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의 사회적인 약자로는 여성이 있었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자립이 되어야 하는데 가정을 지켜야 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는 점이 장애물로 작용한다고 보고,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을 돌보고 지원하여 그들의 잠재성을 발굴해서 사회적인 리더로 성장시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사회에 나가 일을 할 수 있게 해서 경제적 자립도 이루어낼 수 있도록 아이들을 맡아주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어요. 방과 후 공부방을 만들어서 공부도 하게 하고 숙제도 봐주고 잘 놀 수 있도록 돌봐주고 저녁밥도 챙겨주면서 밤늦게까지도 엄마들이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게 했어요. 그 이후에 지역아동센터가 만들어지면서 나라의 복지정책으로 제도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셈이지요.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우리 단체에서 조금은 앞서서 달려왔다고 자부합니다. 사회적인 복지는 어차피 정부에서 해야 하는 일이기에 제도권 쪽으로 들어가도록 하고 이제는 일반 지역 주민들과 평화의 집이 더불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동안 많은 일을 하셨고, 또 열정도 많으신데 잘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고향은 어디 신가요?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60세가 되도록 평생을 몸 바쳐서 일을 해오시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저의 고향은 충북 보은이라는 시골입니다. 속리산으로 유명한데 거기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구병리’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진짜 너무너무 가난해서 보리죽도 제대로 못 먹고 사는 집의 11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어요. 당시에는 다 못살았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우리 집이 아마 제일 가난하게 살았을 거예요. 형제가 많으니까, 부모님은 자식들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으셨고 농사일하고 밭일도 해야 하니까 정신이 없기도 하셨는지 제가 태어나서 열병이라는 걸 심하게 앓으니까 죽었나보다 하고 짚으로 둘둘 말아 동여매 갖고 차가운 윗목에다 놓아두었대요.
낮에 죽었으니까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창피하고 민망하니까 아무도 모르게 밤에 죽은 애를 지게에 지고 나가서 버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신경이 쓰이셨는지 거적때기를 들쳐서 보니까 애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더래요. 그래서 제가 살았어요. 만약에 밤이 더 어두워졌으면 아마 자세히 보지도 않고 내다 버렸을 거예요. 그때 앓았던 열병이 소아마비가 되어서 저는 장애인이 된 거예요. 이렇게 아프고 사람 노릇을 못 할 거 같으니까, 부모님께서는 호적에 올리지도 않고 그래도 계속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까, 나중에 호적에 올려서 제 동생보다 제가 더 어린 나이가 되었어요.
초등학교밖에 공부를 못했어요. 내가 이렇게 소아마비로 몸이 안 좋으니까 육체적인 노동을 해서 먹고 살 수는 없고 앞으로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무실에 앉아서 행정사무를 보는 일을 해야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래도 집안 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또 돈이 없다고 초등학교 졸업 후 더 이상 공부를 시킬 수가 없다고 하니까 저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했어요. 처음 서울에 도착한 곳이 영등포역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윤락여성들이 있는 사창가라는 데에서 보이 노릇을 했어요. 심부름꾼이었죠. 월급 같은 건 물론 없었고요. 안내를 해주면 어떤 손님은 10원짜리 동전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그게 주 수입원이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밤에 나가 활동하던 넝마주이나 구두닦이들이 영등포역에 진을 치고 잠자고 있었어요. 그 주변에 잠시 눈을 붙이려고 누워있으면 아무 곳이나 붙들고 끌고 가는 거예요. 사람이 없는 구석에다 던지듯 팽개쳐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거예요. 발로 밟고 따귀도 때리고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무조건 맞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새로 들어온 놈이 기가 죽고 고분고분 저희네 말을 잘 들을 거라고 그렇게 패서 길들이는 거라고 하더군요. 신나게 맞고 며칠 밥도 굶기고 그러다 보면, 나보다 한두 살 나이가 많은 거 같은 놈이 통행금지가 딱 풀리는 시간이 되면, 넝마 질통을 메고 앞장서서 나가요. 나는 집게를 들고 따라다니면서 쓸만한 거를 주어서 질통에 다가 던져넣고 그래서 질통이 좀 차게 되면 그걸 골라서 팔아서 돈을 갖다주면, 그 돈을 두목이 채가서 쓰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79년인가 80년인가 그때쯤 광명시 하안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어요. 성당을 찾아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고향 충북 보은에 있는 성당에 우리 어머님이 4년을 다니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시는 분이셨는데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려면 찰고( 세례받기 전에 주요기도문을 외우고 천주교의 중요교리를 문답으로 대답)를 통과해야 하는데 어머님이 글을 모르시니까 기도문을 외우지도 못하고 교리에 대답을 못 하셔서 세례를 받지 못하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신부님이 참 고지식하셨던 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 그것도 다 섭리구나 하는 생각도 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고향에 혼자 남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성당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어머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다 데리고 성당에 나가서 함께 세례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온 집안이 다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막내 여동생이 수녀가 되었고 조카가 신부가 되었어요. 가톨릭 청년연합회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방문하셨을 당시에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던 청년들과의 만남에 구 지구 청년연합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그걸 계기로 도시 빈 민회에 입회하고 활동을 해오다가 2002년에 검정고시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고입과 대입을 마치고 2006년에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습니다. 4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날짜 : 2024년 10월 28일
대상 : 강경구 (자원을 일구는 사람들 대표)
장소 : 독립문 평화의 집 사무실
기록명 : 빈민을 위해 투쟁해온 삶
주제 : 종로의 사람
-선생님 소개를 부탁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무학동 선교본부 부설 독립문 ‘평화의 집’ 사무국장이며 평화의 집에 부설되어 있는 ‘자원을 일구는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협동조합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강경규라고 합니다.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1990년 당시에 한참 서울의 여러 지역에서 재개발로 인해서 철거하는 무허가주택이 많이 발생하고 그 철거로 인해서 세입자들이 아무런 주거 대책도 없이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저희는 대책 없이 쫓겨 나가야만 하는 세입자들에게 정부로부터 정책적으로 제도를 마련해서 그분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대변해 줄 수 있는 역할을 해보고자 설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대교구 내의 무악동 선교 본당 소속 도시빈민회 회원들로서 지역의 철거민들을 대상으로 한 주민조직 사업을 지원하는 민간단체였죠.
단체 내에는 부님 수녀님과 일반 평신도를 비롯하여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을 같이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체에 회원들이 많아져서 한꺼번에 한 장소에 모여서 활동에 대해 논의하고 계획을 수립하기는 벅차고 그러니까 서울시 내에 네 군데 즉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서 지부를 만들어 각자의 지역에서 지부 단위의 모임을 운영하면서 회원들이 회의하고 공유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해서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주교 도시빈민회를 처음 활동하기 시작한 건 1985년부터 했어요.
여기 무악동으로 이사 온 시기는 1987년 9월에 왔어요.
처음에는 박문수 신부님께서 공부방부터 시작했어요. 주민들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던 거죠. 가난한 여성들이 직장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에 하루 종일 나가서 일할 수가 없는 사정을 알고 탁아소처럼 아이들을 맡아서 돌봐주고 공부도 도와주고 그러면 여성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기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할 수가 있고 그러면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게 발전하여 지금의 하누리 지역아동센터가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컴퓨터 교육을 하기도 했어요. 그 당시에 막 도스로 한글을 배우기도 하고, 파출부 교육이나 간병인 교육을 해서 필요로 하는 곳에 연결해 주어 일자리 창출도 하고 수요처에서는 잘 교육받은 간병인이나 파출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어요.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다양한 기술이나 재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었어요. 봉제 기술이 있는 분들은 옷을 만들기도 하고 개량 한복을 만들어서 필요한 단체에 납품할 수도 있었고, 그러다가 이 지역의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철거가 시작되니까 세입자들이 갈 곳 없이 쫓겨나야 하는 현실을 목도 하고 세입자 대책위원회가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죠. 흩어져있는 세입자들은 자기들의 요구사항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던 시기였어요. 도시빈민회에서 세입자 대책위원회에 지원하는 기관이 되었던 거죠. 천주교 서울대교구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1999년에 최초로 도시 공소를 만들어 주셨어요. 이기우 신부님이 파견되시어 선교 본당으로 인가를 내주셨어요. 선교 본당은 다른 본당과는 차이가 있어요. 일반 본당은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모든 대상자를 모두 수용하는 종교공동체라고 한다면 선교 본당은 가난한 사람들 또는 사회적 약자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이죠. 천주교 신자들은 선교활동가 역할을 하면서 비신자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신앙공동체를 만들어서 모임도 하고 친교도 나누는 공간이 되었죠.
-천주교의 선교를 주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선교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공간이 더 중요했어요. 도시 빈민위원회원과 주변에 있는 세입자 중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모이면 그 공간에서 미사드릴 수 있는 게 선교 본당의 역할이었어요. 종교라는 것 때문에 문턱이 높다고 생각하거나 비신자들은 종교에 배타적일 수도 있고 거부감을 느낄 수가 있어서 평화의 집이라는 종교를 초월하고 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 공간이고 그들을 지원하는 장소가 1999년에 만들어진 평화의 집이에요. 이런 단체가 서울 시내에 4개가 있어요. 여기는 무악동 선교 본당인 거죠. 무악동 현대아파트가 재개발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철거가 되고 이주민이 대책 없이 쫓겨 나가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어 단체의 활동이 확장된 셈이지요.
-무악동이 재개발되기 이전엔 여기 이 동네의 상황이 어땠나요?
서울시 내에 있는 달동네와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가파른 오르막길에 무허가 집들이 촘촘하게 지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골목길이 삐뚤빼뚤하게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어서 마치 미로찾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익숙한 동네 사람들도 길을 잃을 정도였어요. 오르막길에는 바닥에 마사토가 흘러내리고 있어서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엉덩방아를 찧어서 부상자가 많이 생기고 그랬어요. 마사토라는 게 돌멩이가 부서지면서 생긴 알갱이인데, 모래알보다 조금 더 굵어서 바퀴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오르막에 그 마사토가 있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에요. 등산하는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다가 넘어져서 부상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마사토에 미끄러져 생기는 수가 많다고 할 정도로 아주 미끄러워요. 중간중간에는 시멘트 계단도 있었는데 인체 공학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가파르게 마구마구 무식하게 만들어놔서 보폭이 작은 아이들이나 어르신들이 이용하기가 매우 불편했어요.
집들의 형태는 번듯한 집도 동네 아래쪽에는 좀 있었지만 대부분 판자촌 같았어요. 빌라 형태는 별로 없었어요. 언제부터 빌라가 지어졌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4층 정도까지 올라간 건물은 없었으니까요.
이미 서울 시내의 사당동이나 상계동 상도동 같은 동네에서는 마구잡이로 재개발을 진행하고 세입자들을 강제로 내쫓아내서 길거리에 나 앉기도 하고 부상자가 생기고 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어요. 심하면 무자비한 철거에 의해 집안 내부에 있다가 지붕이 내려앉으면서 거기에 깔려서 다치는 사람도 발생하고, 부서지는 벽에 어린이가 깔려서 사망하는 사건이 생기니까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이런 상태에서 종교가 할 일이 무엇인가? 천주교에서 할 역할은 없는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고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상계동이나 그런 철거 현장에 살면서 철거민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하기 시작했었죠.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포크레인의 커다란 삽 안에 들어가서 철거 현장을 막기도 하고 수녀님들은 머릿수건이 벗겨지기도 하고 그렇게 저항하고 그런 처참한 사태를 보시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너무 안타까워하시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시다가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 주거정책에 대한 목소리를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하니 자문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도시 빈민사목위원회입니다.
정일우 신부님이나 루한 신부님, (외국인 신부님이신데 철거 현장에서 깡패들한테 맞아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었던) 제정구 선생님, 성심수녀회 손인숙 수녀님 등등이 참여하시면서 자문 회의를 통해서 천주교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할을 했어요. 그러다가 그런 현장에 교회가 필요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그런 현장에 활동가들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게 선교 본당이에요. 종교를 초월한 이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우리가 활동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외부에서 지원이 들어오면 그 지원 내용을 공유하고 배분하면서 그분들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일거리나 스스로 자립할 방법을 제시하고, 함께 하다가 이 지역이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그동안 무허가에서 살던 사람들이 집이 헐리게 되고 올라가는 집값을 감수할 수 없는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하는 데 익숙한 지역에 살다가 낯선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해야 하니 심한 저항을 하면서 임시로라도 가 수용 시설을 먼저 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에 재개발조합이나 정부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조건이었어요.
왜냐하면, 예산이 많이 들어가고 재개발 단지 내에 공간을 또 별도로 마련해야 하니까 개발이익이 줄어들게 되거든요. 철거민을 비롯한 단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전국 단위로 싸움하고 목소리를 내고 하니까 나중에는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거예요. 무악동도 마찬가지예요. 무악현대아파트 부지 한 귀퉁이 부분에 철거민들을 위한 가수용 시설을 짓게 되었어요. 바로 그 위치에 임대아파트가 지어진 셈이지요. 임대아파트에 들어가서 살게 되면서 각자의 개별적인 삶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공동체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할 텐데, 고민하다가 한솥밥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경제공동체를 이루어낼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보자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주거 안정이 되니까 점점 지역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지게 되는 것이었어요.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렇더군요. 자기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되면 죽기 살기로 열심히 활동하는데, 생활이 안정되고 추구할 만한 게 소박해지니까 공동체를 위해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 점점 열정이 사라지는 거예요. 아파트에서는 주민 자치위원회라는 게 만들어지고 분양받아 들어온 입주민들이 임대아파트 주민들을 합류시켜 주지 않으려고 하니까 조직체가 대항해 주길 원하게 되어 임대아파트 연합이라는 걸 결성해서 임대아파트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목소리를 내서 아파트 운영을 가진 자들만의 입맛에 맞게 운영되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 맞는 방향으로 운영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어요. 위에 활동은 평화의 집이라는 단체에서 해온 일이에요. 평화의 집에는 예수회 신부님과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하시는 신부님께서 함께 해주셨어요. 임대아파트 자치위원회에 계속 머무르면서 활동을 지속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치회가 잘 운영이 되자 돈이 오가게 되고, 그러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그런 일이 발생하니까 담당 신부님께서 자신끼리 이권을 갖고 권력다툼을 하는 곳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하시면서 자치위원들이 운영하도록 맡겨 놓고 발을 빼고 나오게 되었어요.
-혹시 평화의 집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 중에 무악동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분이 함께 계셨을까요?
신부님이나 활동가 중에는 그 아파트에 들어가 사는 주민은 없었어요.
지원만 해줬어요. 대항하는 방법이라든가 법적인 조항이나 그런 것에 대해 자문해 주는 그 정도였지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의 사회적인 약자로는 여성이 있었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자립이 되어야 하는데 가정을 지켜야 하고 아이를 돌봐야 하는 점이 장애물로 작용한다고 보고,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을 돌보고 지원하여 그들의 잠재성을 발굴해서 사회적인 리더로 성장시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사회에 나가 일을 할 수 있게 해서 경제적 자립도 이루어낼 수 있도록 아이들을 맡아주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어요. 방과 후 공부방을 만들어서 공부도 하게 하고 숙제도 봐주고 잘 놀 수 있도록 돌봐주고 저녁밥도 챙겨주면서 밤늦게까지도 엄마들이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게 했어요. 그 이후에 지역아동센터가 만들어지면서 나라의 복지정책으로 제도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셈이지요.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우리 단체에서 조금은 앞서서 달려왔다고 자부합니다. 사회적인 복지는 어차피 정부에서 해야 하는 일이기에 제도권 쪽으로 들어가도록 하고 이제는 일반 지역 주민들과 평화의 집이 더불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동안 많은 일을 하셨고, 또 열정도 많으신데 잘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고향은 어디 신가요?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이렇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60세가 되도록 평생을 몸 바쳐서 일을 해오시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저의 고향은 충북 보은이라는 시골입니다. 속리산으로 유명한데 거기서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구병리’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진짜 너무너무 가난해서 보리죽도 제대로 못 먹고 사는 집의 11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어요. 당시에는 다 못살았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우리 집이 아마 제일 가난하게 살았을 거예요. 형제가 많으니까, 부모님은 자식들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으셨고 농사일하고 밭일도 해야 하니까 정신이 없기도 하셨는지 제가 태어나서 열병이라는 걸 심하게 앓으니까 죽었나보다 하고 짚으로 둘둘 말아 동여매 갖고 차가운 윗목에다 놓아두었대요.
낮에 죽었으니까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창피하고 민망하니까 아무도 모르게 밤에 죽은 애를 지게에 지고 나가서 버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신경이 쓰이셨는지 거적때기를 들쳐서 보니까 애가 죽지 않고 살아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더래요. 그래서 제가 살았어요. 만약에 밤이 더 어두워졌으면 아마 자세히 보지도 않고 내다 버렸을 거예요. 그때 앓았던 열병이 소아마비가 되어서 저는 장애인이 된 거예요. 이렇게 아프고 사람 노릇을 못 할 거 같으니까, 부모님께서는 호적에 올리지도 않고 그래도 계속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까, 나중에 호적에 올려서 제 동생보다 제가 더 어린 나이가 되었어요.
초등학교밖에 공부를 못했어요. 내가 이렇게 소아마비로 몸이 안 좋으니까 육체적인 노동을 해서 먹고 살 수는 없고 앞으로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무실에 앉아서 행정사무를 보는 일을 해야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래도 집안 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또 돈이 없다고 초등학교 졸업 후 더 이상 공부를 시킬 수가 없다고 하니까 저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했어요. 처음 서울에 도착한 곳이 영등포역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윤락여성들이 있는 사창가라는 데에서 보이 노릇을 했어요. 심부름꾼이었죠. 월급 같은 건 물론 없었고요. 안내를 해주면 어떤 손님은 10원짜리 동전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그게 주 수입원이었어요.
그때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밤에 나가 활동하던 넝마주이나 구두닦이들이 영등포역에 진을 치고 잠자고 있었어요. 그 주변에 잠시 눈을 붙이려고 누워있으면 아무 곳이나 붙들고 끌고 가는 거예요. 사람이 없는 구석에다 던지듯 팽개쳐놓고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거예요. 발로 밟고 따귀도 때리고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무조건 맞기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새로 들어온 놈이 기가 죽고 고분고분 저희네 말을 잘 들을 거라고 그렇게 패서 길들이는 거라고 하더군요. 신나게 맞고 며칠 밥도 굶기고 그러다 보면, 나보다 한두 살 나이가 많은 거 같은 놈이 통행금지가 딱 풀리는 시간이 되면, 넝마 질통을 메고 앞장서서 나가요. 나는 집게를 들고 따라다니면서 쓸만한 거를 주어서 질통에 다가 던져넣고 그래서 질통이 좀 차게 되면 그걸 골라서 팔아서 돈을 갖다주면, 그 돈을 두목이 채가서 쓰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79년인가 80년인가 그때쯤 광명시 하안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어요. 성당을 찾아가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고향 충북 보은에 있는 성당에 우리 어머님이 4년을 다니셨어요. 우리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시는 분이셨는데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려면 찰고( 세례받기 전에 주요기도문을 외우고 천주교의 중요교리를 문답으로 대답)를 통과해야 하는데 어머님이 글을 모르시니까 기도문을 외우지도 못하고 교리에 대답을 못 하셔서 세례를 받지 못하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신부님이 참 고지식하셨던 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 그것도 다 섭리구나 하는 생각도 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고향에 혼자 남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서울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성당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어머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다 데리고 성당에 나가서 함께 세례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온 집안이 다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막내 여동생이 수녀가 되었고 조카가 신부가 되었어요. 가톨릭 청년연합회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방문하셨을 당시에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던 청년들과의 만남에 구 지구 청년연합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그걸 계기로 도시 빈 민회에 입회하고 활동을 해오다가 2002년에 검정고시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고입과 대입을 마치고 2006년에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습니다. 4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어려운 길을 묵묵하게 걸어오셨네요. 어찌 보면 참 힘들었을 기간을 잘 견디시고 지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계시죠? 결혼은 하셨나요?
결혼은 안 했어요. 연애는 몇 차례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는데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가정을 지키면서 양립하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많아요.
함께 일하고 있는 다른 동료분들은 결혼생활도 잘 영위하고 일도 열심히 잘하는데 저는 특수한 환경이잖아요. 이렇게 핸디캡도 가지고 있고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젊었을 때는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그랬어요. 사회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유혹에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 술과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거예요.
도시빈민운동의 특성상 노동자들이나 힘든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그분들과 술도 함께 마셔야 해요. 그분들은 365일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어요. 만나면 첫인사는 ‘술 한잔합시다’ 가 일상용어일 정도예요.
술을 마시고 같이 담배도 피우면서 얘기를 해야만 라포(상담이나 교육을 위한 전제로 신뢰와 친근감으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 형성이 잘 돼요. 그래야만 그분들의 속내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들을 수 있고 친교가 이루어져서 응집력이 생기기도 해요. 그러다 보니까 술을 마시는 기회가 많았어요. 나이가 많아지면서 점점 건강이 안 좋았어요. 지금은 술도 다 끊었고 흡연도 안 하고 있어요.
지금은 오래 활동했던 선배들은 거의 은퇴했고 후배들은 지원자가 없어서 활동가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평화의 집이 점점 침체기에 들어가고 있는 거죠. 그건 바로 우리나라가 모두 잘 사는 사회가 됐다고 할 수 있는 바람직한 현상인 거겠지요.